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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숲 Apr 25. 2023

그리움의 색 _진보라

5월의 라일락나무

Life is full of flowers.

삶은 꽃으로 가득하다.


해질녘의 어스름. 땅거미가 짙어지고 올려다본 하늘은 아직 짙은 파랑을 간직한 시간.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짙고 아득한 향기가 발길을 붙잡았다. 봄날의 따뜻한 공기를 가득 물들인 향. 홀린 듯 그 향의 근원을 찾아 옮긴 발길 끝에는 진한 보라색의 꽃송이를 가득 매단 키 큰 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의 라일락나무. 짙은 향만큼이나 짙은 보라를 품고 있던 꽃송이들. 나무 아래 서자 짙은 향기에 온몸이 젖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곳에 항상 있었던 나무 한 그루. 보라색 꽃이 피는구나 하고 흘깃 쳐다보던 나무. 그 나무가 그날 그렇게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날의 향이 너무도 짙어서였을까. 나에게 그 나무는 너무도 진한 보라색 꽃송이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나무처럼 짙고 진한 보라색 꽃송이를 매단 라일락 나무를 나는 아직도 찾고 있다. 아니야, 너무 연해. 한참 더 짙은 색이어야 해. 반가운 향에 고개 돌려 찾아내고선 꼭 실망의 말이 뒤따른다. 어떤 나무도 나의 그 라일락 꽃색을 찾아주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그 짙은 꽃색을 찾고 있다. 빠지면 도저히 못 헤어나올 것 같은 깊은 바다처럼 아득하고 짙고 진한 보라색을.


그날의 만남 이후 나의 5월은 그 나무에 매달린 진한 보라의 짙은 향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곧 5월이구나. 이제 곧 라일락이 피겠구나. 나무를 만나러 가야지. 10대 시절을 건너는 동안 나의 5월은 라일락의 향으로 가득했다.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을 그 나무가 알려줬다. 짙은 보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향에 취해 깨달았다. 


세월이 흘러 우물터가 어느 날 메꿔지면서 우물가의 라일락 나무도 사라져 버렸다. 아파트 단지 안 그 우물터엔 새벽마다 저녁마다 물 길으러 오는 사람들이 가득했었는데. 아주 어릴 땐 마중물 붓는 수동 펌프였고 얼마쯤 세월이 흘러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도록 개량되었다. 마중물 붓고 손잡이 움직이는 재미는 없어졌지만 편하게 물 받아가기는 좋았다. 수질이 좋아 집집마다 떠다 먹는 물이었는데, 세상이 좋아지면서 수질은 탁해져 버린 걸까. 우물물도 사라지고 라일락 나무도 사라져 버렸다.


몸에 새겨진 감각은 사라지지 않아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5월이 다가오면 그 향과 색이 떠올랐다. 지구 온난화 탓에 꽃이 피는 시기가 빨라져 4월이면 라일락이 핀다. 3월이 유난히 따뜻했던 올해는 아예 3월 말 4월 초부터 연보라 꽃망울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기가 빨라져서일까. 가로수니 정원수니 라일락은 많이도 보이지만 보랏빛이 연하다. 5월이 아니라 4월에 만나는 라일락이라서 섭섭하고, 진한 보라가 아닌 연한 색도 섭섭하다. 해질녘 어스름에 슬며시 가라앉던 마음을 짙은 향과 색으로 진하게 채워주던 그 나무가 여전히 그리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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