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 때

친구에게

by 안드레아
[ 홍콩 10일차 ]

그렇게 굳게 다짐을 하고 결의에 차 있었는데 웬걸. 한 순간에 날려 버린 거 있지. 그냥 펑! 하고 터져 버렸어.

새로운 곳, 낯선 곳이라 설렘도 있었고 두려움도 조금 있었어. 게다가 이제 40대 중반의 나이. 한 직장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필요없을 통과의례를 처음부터 다시 거치는 일은 제법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하잖아.


이미 5년 전 서울에서 키타큐슈로 일터와 집을 옮기면서 충분히 경험하긴 했어. 일어도 잘 못하면서 일본 직원들만 있는 일본 회사에 가서 어버버 하면서 말을 배우고 눈치 보면서 일본 동료들 사이에 자리잡고자 노력했지. 일본 사람들의 인간관계 맺기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고, 그 나라의 조직과 문화를 알기 위해 책도 읽고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봤지. 이해관계를 좀 떠나 있는 성당이나 테니스장에서 알게 된 일본 사람들과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그런 주제들에 대해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


그래 친구야, 나 거기서 잘 적응했지. 알지? 인구 100만이 채 안되는 넑고 한적한 키타큐슈의 많은 걸 내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게 되었는지. 차로 10분만 가면 닿는 북쪽 바다와 서쪽 바다, 호수처럼 운치있던 톤다 저수지와 카와치 저수지, 타카토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와카토대교의 야경..


아후, 나 지금 뭐 하는 거니? 홍콩에 와서 일본 생각을 자꾸 하네. 아니, 일본에서 살던 내 모습을 떠 올리는 거겠지.


18년 동안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고 중국을 거쳐 일본에 갔다가 잠시 서울 찍고 다시 홍콩으로 왔어. 어딜 가든 적응하는데 자신 있었고 새로운 걸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 홍콩은 예전 중국 광저우에 살면서 여러번 와 본 곳이라 문제도 아니라 생각했어.


그런데 친구야! 이것 참 만만치가 않구나. 여기 온 첫날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정한 집에서 혼자 며칠 잠을 자는데 말야. (집에 이불도 없고 간이 침대만 달랑 있어. 밑에 수납장이 있는 높이 80센티 정도 되는 높은 침대란다. 날씨는 덥지만 배가 허전해서 이불 대신 옷을 덥고 자.) 마음이 너무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더라. 성냥갑을 위로만 쌓아 놓은 것처럼 가늘고 높다랗게 서 있는 아파트 고층에서 바라보는 어두운 타국의 밤이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았어.


너무 잘 해 보려고 했던 걸까. 쉽지 않을 거라는 말들에 지레 겁을 먹고 지나친 각오를 다진 걸까. 앞으로 해내야만 하는 일들이 버겁게 느껴진 걸까. 문을 열고 들어오긴 왔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두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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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난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함부로 내뱉는 말과 행동에 폭발한 적이 있었어. 그때까지 잘 참고 잘 해 보려 했던 마음이 단 한 순간에 싹 가셔버리는 거지. 그럴 때 내 얼굴엔 미소가 사라져. 그리곤 냉정하고 전투적인 표정과 몸짓으로 변신하는 거지.


상대도 이내 알아차려. 부드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한 마디만 더 허튼 소리를 하면 끝장을 내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거칠게 풍길 테니. 하지만 그 순간에도 최소한의 예의를 잃지는 않아. 논리를 앞세우고 감정이 나에게 약점 잡히도록 놓아두지 않으려고 해.


그 자리를 떠났어. 더이상 말을 섞는 건 서로에게 무의미했으니까.


친구야, 나 하나도 안 변했지? 알아. 철이 안 드는 거지. 일하고 싶은 마음이 싸악 사라지긴 했는데 한편으론 잘됐다 싶은 마음도 드는 거 있지.


너무 선량하게 너무 좋은 사람인 양 내 깜냥으로 다 안되는 걸 하려고 했던 거라 생각해. 이런 해프닝으로나마 내 상태가 어떤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몰라.


내 주특기 알지? 그렇게 하고 나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 잘 했어. 깍듯하게, 성실하게, 쓸데없이 무게 잡지 않고, 일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친구야!


마흔 넘어도


이거 왜이리 어렵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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