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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Feb 15.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서 줄을 섰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미시즈 윌슨은 펄롱에게 큰 사전을 이용해서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라며, 누구가 어휘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펄롱은 그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어희'가 아니라 '어휘'였다. 이듬해 펄롱이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부상으로 밀어서 여는 뚜껑을 자로도 쓸 수 있는 나무 필통을 받았을 때,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다녔다.


 1946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의 마음이, 1973년 한국에서 태어나 50대에 들어선 나에게 왜 이토록 와닿으며 저릿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걸까. 


 낮기온이 17도까지 오르며 갑자기 봄이 된 서울 시내를 걸었다. 햇살마저 화창하게 비추어 구석구석 머물러 있던 추위의 스산함을 말끔히 몰아낸 하루였다. 마음과 머리는 끊임없이 한 달의 지출 내역을 더했다 뺐다 하며 언제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이 압박감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인지 골몰하는 모습과 사뭇 대조가 되는 완전한 봄날 그 자체였다. 그래도 근사한 하늘과 햇살 머금은 공기는 이런 나에게도 좋았다.


 80년대 아일랜드에서 살아가는 소설 속 중년 남자가 느끼는 삶에 대한 무게와 소회가 시대와 국적을 초월해 전혀 다른 시대와 국가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똑같이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인간의 삶이란 거기서 거기인 건가. 아니면 내가 우연히 펄롱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공감대를 가지게 된 건가. 이유가 어찌 되었건 이 남자의 생활과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다. 알듯 말듯한 동질감과 그로 인한 유대와 위로가 곁들여진 느낌을 받으며 읽고 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한다. 벌써 자정을 넘겼다. 책을 더 읽고, 글을 더 쓰고 싶지만 더 나아가면 내일이 피곤해질 거다. 이쯤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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