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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ul 19. 2019

[단편소설] 그 노인의 노래 (1)

그 노인의 노래 (1)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할 때마다 사위를 둘러싼 붉은 빛이 느껴졌다. 차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구나. 아니, 동이 트는 건가. 시현(施炫)은 잠결에 프랑스 사람들의 표현을 떠올렸다. 개와 늑대의 시간. 멀리 보이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칠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몽롱한 의식을 깨운 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었다. 부르르 진동하는 액정에 선배의 이름이 떴다. 반쯤 감겼던 눈꺼풀이 화들짝 올라갔다. 택시 기사에게 라디오 볼륨을 줄여달라 부탁했다. 목소리에 묻은 졸음을 헛기침해 털어냈다. 펜과 수첩을 챙긴 뒤 전화를 받으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한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받아적을 준비됐냐? 관내에서 오늘 오후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갓난아이와 60대 여성. 경찰은 피의자 검거 마쳤고. 근데 금요일 오후이고 하니 월요일 오전에 검거 관련 언론 브리핑을 하겠단다. 우린 오늘 저녁부터 주말까지 계속 파고 월요일 조간에 기사를 쓴다. 넌 오늘 내로 사건 현장 어딘지 파악하고 가서 취재 후 보고해. 질문?


9년 차인 선배는 얼음 같은 사람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사람. 경찰이 취재에 불분명하게 응하면 곧바로 경찰서장 방에 쳐들어갔고, 찾는 교수가 출장을 갔다고 하면 그 길로 총장실 문을 박찼다. 그러면 우물쭈물하던 경찰이 능변가가 됐고, 멀리 떠났다던 교수가 마술처럼 등장했다. 기사도 그렇게 썼다. 엎지른 물처럼 흩어진 모호한 사실들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작고 단단한 얼음처럼 한 마디로 규정됐다. 선배는 상황의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에 집중하는 법을 알았다. 그래서 선배 기사의 제목엔 분명한 메시지가, 첫 문장엔 사건의 요점이 간결히 담겼다. 이제 막 기자가 된 시현은 정반대였다. 하늘을 봐도 저게 노을인지 동이 트는 건지 수시로 헷갈리듯, 수많은 사실 가운데 어떤 것이 핵심인지 몰라 헤매기 일쑤였다. 선배가 이런 시현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보듬을 리 없었다. 불호령은 매일 폭설처럼 내렸다. 그때마다 시현은 조바심과 자괴감에 파묻혔다. 핵심만 가지런히 정리된, 선배를 감탄하게 할 보고를 하고 싶었다.


낮에 달궈진 공기가 밤이 돼도 통 식지 않는 7월이었다. 시현은 일곱 박스째 박카스를 샀다. 관내에 위치한 119안전센터 일곱 군데를 택배기사처럼 정신없이 돌았다. 떨떠름한 구급대원들 표정을 일곱 번 마주하고 안전센터장이란 자들과 일곱 잔의 믹스커피를 마셨다. 셔츠가 어느새 땀으로 축축했다. 일곱 번째로 만난 안전센터장은 시현과 동성동본인 중년의 여성이었다. 수습기자란 인사에 안전센터를 찾아온 기자는 처음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안전센터 곳곳을 내보이며 뭐든 알려주려 했다. 안전센터장의 호의에 마음이 말랑말랑 풀어지다 선배 지시가 생각나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음을 차갑게, 단단히 벼려 핵심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찰 말이 살인사건이 있었다면서요. 갓난아이와 60대 여성. 어차피 월요일 아침에 브리핑이긴 하지만 현장이 대충 어땠었나 궁금한데...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정적 사이로 카운트다운처럼 울렸다. 말없이 이마를 긁던 안전센터장은 브리핑을 월요일에 한다는 거죠? 라며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잠깐 쓱 보여줄 테니 훑어봐요. 시현 쪽으로 돌린 모니터 속엔 상황보고서가 있었다. 이름, 출생연도, 주소. 모니터가 회전하기 전부터 속으로 되뇌던 세 가지 핵심 정보에 집중했다. 안전센터장은 막 첫 수업을 마친 신임교사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를 원위치시켰다. 됐죠? 아들 같아서 특별히 보여준 거예요. 안전센터장의 말을 흘려들으며 머릿속을 더듬었다. 취재의 길잡이 역할을 할 세 가지 정보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감사 인사를 남긴 채, 범죄 현장에서 도망치는 도둑처럼 급하게 안전센터를 빠져나왔다.


사건 현장인 다세대 주택 밀집 지역 골목엔 늦은 시간임에도 주민들이 몰려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잡혀간 게 바깥양반이지? 그 양반 돈을 많이 벌진 못했다지만 옛날 사람답지 않게 아내한테 다정했는데. 안사람이 요리 좋아한다고 매일 같이 시장 구경 가고 그랬잖아. 지난달인가, 마트에서 보니 부인 앞치마를 한참 골라주고 있더라니까. 동네 반상회 때 보니까 그 양반 완전 똥고집 노인네던데?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그런 양반이 아내 말은 잘 듣더라구. 오늘? 복날이라 더워서 창문을 다 열어뒀지. 근데 오후 세 시쯤 갑자기 여자 비명이 들리는 거야. 애를 낳을 때나 나는 소리... 짐승 울음소리처럼 날카로운 게 한참 이어지다가 뚝 멈추데. 부인이 얼마 전 치매에 걸렸어. 저기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에 피 좀 봐봐. 식칼로 죽였다던데 믿기지가 않아. 아내는 치매 때문에 괴로워 그랬다 치고, 손주는 왜 그랬나 몰라. 모르는 소리 마. 그 양반 아들하고 며느리가 애 맡기러 오면 데리고 가라고 막 호통치고 그랬어. 처를 돌봐야 하는데 손 많이 가는 애가 내켰겠어? 날아다니는 말들을 정신없이 채집해 선배에게 전화로 보고했을 때 돌아온 답은 간결했다. 치매? 간병살인이겠네. 폴리스라인 너머로 몰래 들어가 봐. 가서 봐. 빠짐없이 적어서 보고해. 


주민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마침내 골목이 정적에 잠겼다. 노란 폴리스라인 너머로 건너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더운 열기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쳤다. 형광등을 켜니 원목 무늬의 거실 바닥에 붉은 핏자국이 바느질 자국처럼 일렬로 뚝뚝 이어져 있었다. 따라가 보니 시작점은 부엌이었다. 빨간 페인트통을 들고 통째로 뿌린 듯한 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싱크대는 깨끗했다. 그 안으로 바구니에 불린 쌀과 씻으려고 준비한 듯한 마늘과 파가 보였다. 수도꼭지가 꽉 잠기지 않았는지 아래에 놓인 새하얀 도마 위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부엌 바닥엔 검붉은 핏자국이 카펫처럼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식탁. 그곳엔 노부부의 기념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었다. 아내는 흰 원피스에 앞치마를 입은 채 국자와 냄비를, 남편은 진회색 슈트를 걸친 채 책과 분필을 든 모습이었다. 결혼 40주년 기념. 사는 내내 잊지 말아요. 나는 항상 당신 편이야. 글자 밑에 적힌 촬영 날짜는 약 3년 전. 액자 군데군데 묻은 붉은 손자국 때문에 글자 읽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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