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명 Jul 21. 2019

[단편소설] 그 노인의 노래 (5)

그 노인의 노래 (5)


박 순경이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시현은 주인이 오기만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달려가 말을 붙였다. 순경님, 퇴근이시죠? 저랑 사건 현장 한 번만 다시 가요. 늘 서글서글 웃으며 시현을 대하던 박 순경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별문제 없잖아요. 어차피 현장검증도 다 끝났는데… 끙 하는 신음과 함께 눈썹만 긁는 박 순경을 보며 시현은 선배를 떠올렸다. 선배는 아랫사람이 말을 잘 안 들으면 항상 그 위를 조졌다. 박 순경을 기다리며 고안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불러낸 뒤 박 순경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여러 번 연습한 대사를 연기하듯 천천히 읊조렸다. 순경님, 저 이거 김 경감님께 보여드려도 돼요? 지난주 토요일에 우리 통화한 기록. 고개를 갸웃하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박 순경에게 마지막 대사를 날렸다. 순경님이 저한테 할아버지가 진술한 내용 전화로 말해줬다고 말씀드리려구요. 덕분에 기사 잘 썼다고… 사납고 덩치 큰 개라도 마주친 듯 박 순경의 표정이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제… 제가 언제요? 아니, 기자님!


막상 핸들을 잡은 박 순경은 생각보다 차분한 모습이었다. 시현은 괜히 미안해져 오늘 일은 절대 김 경감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박 순경은 괜찮다고 했다. 사실 본인도 김 경감이 워낙 쫓기듯 일 처리를 하는 바람에 사건 현장을 제대로 못 봐 아쉬웠다고 했다. 비밀 보장은 믿는다는 말과 함께. 그럼요, 박 순경님도 오늘 저랑 다닌 거 본 거 비밀 보장해주셔야 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박 순경에게 시현은 노인의 향후 처리 계획에 관해 물었다. 며칠 내로 검찰에 송치될 예정이에요. 자백도 했고 증거도 확실하고. 무엇보다 김 경감님이 빨리 처리하려고 해서… 근데 기자님은 사건 현장 왜 가는 거예요? 현장검증 때 다 보셨으면서. 앞유리창 너머 헤드라이트 불빛에 어둠 속 풍경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저도 확실히 모르겠어요. 그냥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순경님과 함께 가보려구요. 순경님, 지난번에 보여주신 수사용 루미놀 용액 스프레이요. 지금 차에 있어요? 혈흔에 닿으면 형광으로 빛난다는 그거.


노인의 집에 도착한 시현은 박 순경과 함께 곧장 부엌 옆 다용도실로 갔다. 다용도실 문을 여니 통돌이형 세탁기가 진술을 거부하는 피의자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현장검증 당시 문을 열어 안을 살펴보고는 다시 닫아 둔 모습 그대로였다. 시현은 박 순경에게 세탁기 문을 열어보라고 했다. 그는 스마트폰 손전등으로 세탁기 안을 비춰보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온통 피로 물든 앞치마 하나가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그 곁엔 붉게 얼룩진 행주 여러 개가 나뒹굴었다. 손을 안에 넣어 앞치마랑 행주 밑에 있는 빨랫감들 좀 만져보세요. 어때요? 박 순경이 앞치마와 행주를 헤치고 빨랫감을 꺼내자 피비린내 사이로 옅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풍겨왔다. 빨랫감들은 세탁기 안에서 열심히 돌았는지 꽈배기처럼 단단하게 꼬여 있었다. 지난번 현장검증 때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뭔가 숨기려는 듯 여기다 급히 던져 넣은 것 아닌가 하는… 모양으로 보나 냄새로 보나 아래 빨랫감들은 빨래가 끝난 게 분명한데, 앞치마랑 행주는 아니에요. 


부엌에 전체적으로 한 번 뿌려봐 주세요. 박 순경이 루미놀 용액 스프레이를 들고 부엌을 향해 포물선을 그렸다. 분사된 용액은 마치 연극의 막이 내리듯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어둠 속 부엌 군데군데로부터 서서히 푸른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싱크대 수도꼭지 밑에 놓인 새하얀 도마는 푸른 빛을 선명히 뿜어냈다. 박 순경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진 눈으로 그 풍경을 말없이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었다. 시현은 싱크대 밑 수납장에서 과도 하나를 꺼내 박 순경에게 건넸다. 움찔거리는 그에게 부탁했다. 이거 들고 칼등으로 제 손목 한번 쳐 보실래요. 박 순경이 떨리는 오른손으로 과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마주 보고 선 시현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안쪽을 치는 시늉을 했다. 박 순경님, 오른손잡이죠? 박 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노인 역시 펜을 오른손에 받아쥐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경찰이 브리핑에서 밝힌 죽은 아내의 상처 위치는 왼쪽 손목 안쪽이었다. 오른손잡이인 노인이 아내를 마주 본 채 죽였다면 오른쪽 손목 안쪽에 상처가 남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시현의 머릿속에서 생각의 조각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그 노인의 노래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