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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ad Mar 01. 2020

치약 맛 럼

하바나 마지막 날에 평소 마시던 것보다 큰 병으로 럼을 마련했다. 보통 400ml를 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고 다니면서 마셨다면 그날은 750ml 정도 되는 걸 샀다. 마지막은 평소보다 더 의미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알량한 마음이 그 럼을 사게 만들었다. 40도가 넘는 도수의 술을 지니고 다니며 그 술기운으로 하바나를 견뎌냈다. 끝내 그날 저녁에 우리는 피곤에 절고 더는 술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가져서 럼을 남겨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에 남은 걸 좀 마시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렇다고 또 버릴 배짱은 못 돼서 페트병에 나눠서 담고 공항에서 걸릴까 두려워 작은 공병에 남은 럼을 채웠다. 가글을 다 하고 남은 작은 병이었는데 박하향 치약 냄새가 잔뜩 묻었다. 한번 꼼꼼히 뜨거운 물로 씻고 잠시 말린 뒤 남은 술을 그 병에 넣어버렸다. 멕시코 공항에서 들어올 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술은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했다.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따서 마셨어야 했는데, 잊고 있다가 생각날 쯤에 그 술을 꺼내니 너무 오래되었기도 하고 넣은 곳이 가글한 병이라 어딘가 찝찝하여 도무지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캐리어 위에 있다가, 방에 그늘진 구석에 뒀다가, 냉장고에 넣었다가 끝내 그 작은 럼이 향한 곳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 캐리어 안의 한 귀퉁이 었다. 버리지는 못하는 이 지긋지긋한 성격. 

한국에 돌아와 백반에 소주를 마시고 김치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그토록 마시고 싶던 한국 술이었는데 멕시코에서 마시던 데낄라나 위스키에 비하면 도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그렇다고 멕시코에서 취한 적은 없는데 한국에 오니 영 취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모셔두었던 럼을 꺼냈다. 치약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그래도 술맛만 있으면 된다. 소주잔에 따르니 딱 한잔 반 정도가 나왔다. 짜장 라면을 끓여 그 위에 치즈와 계란과 고춧가루를 얹어 근사한 안주를 만들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며 한국에 어서 가서 만들어 먹으리라 마음이 간절했던 짜장 라면보다는 쿠바에서부터 보잘 것 없는 오기로 가져온 럼이 더 중요한 순간을 차지한 저녁식사였다. 이제 치약 맛이 나는 건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속은 언제나처럼 금세 데워졌고 나는 노곤해졌다. 과거를 부유하는 나를 자주 만나는 요즘이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다가, 그래도 이렇게 사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이 아니겠나 위로한다. 우울은 그저 스쳐 지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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