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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Jan 20. 2021

질투하는 문장들

습관성 시샘


            

  여기라면 난 초라한 시인을 꿈꿨을 거야, 추위에 떨리는 손으로 친구에게 연락했다.


  소설보다 유명해진 첫 문장을 떠올렸다. 오래도 꿈꿔왔던 여행이었다. 긴 기다림이 기대를 부풀려서, 막상 여행을 시작할 땐 되려 걱정이 앞섰다. 실망하면 어쩌지, 고민했던 마음들을 덮으며 눈은 어깨부터 쌓였다. 두터운 겨울 옷 위로 눈결정이 피어났다. 겨울이 피우는 꽃. 내가 내뿜는 입김보다 따듯하고, 하얀 풍경이었다. 어느새 하늘이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새하얀 바닥에 눅진한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죄스러웠다. 서둘러 걸으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눈들이 지워주길 바랐다. 때 묻은 마음도 용서받을 것만 같았다.      


  나지막이 빈 술병을 셌다. 상기된 얼굴로 혼자 취한 친구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평소 말이 없어 듣는 편이다 보니 내가 떠올랐을 것이다. 빨간 두 눈이 부담스러워 빈 잔에 눈을 맞추고,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면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집중하지 못한 건 아니었는데, 단지 어떤 말을 건네주는 게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는 참이었다. 몇 가지 말을 꺼내려다 꾹 참았다. 혓바닥 위에서 굴리던 말들이 사탕처럼 녹아버려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에겐 편이 되어줄 뻔한 말들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마땅한 대답을 고를 수가 없었다. 오답보다는 공백으로 그가 찾아갈 위로를 남겨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뇌가 티 나지 않게, 적당한 타이밍에 어설픈 주도를 곁들여 그의 술잔을 채웠다. 

  우리는 긴 한숨을 추진력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조금은 후련해졌다는 그의 말이 아프게 꽂혔다. 계산하는 등 뒤에서 난 가방을 뒤적였다.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만류하던 손사래를 치던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내가 가방에서 꺼낸 책 한 권까지 마다하진 않았다.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될진 몰라도,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의심치 않았다. 멀어지는 그의 팔 끝에 헤진 책 한 권이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매혹된다는 건 낭만적이지만,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 문장이면 충분했고, 노래에 빠진 건 한 소절로 충분했다. 몇 번이나 영화를 돌려보며 좋아하는 대사를 기다리는 건 꽤 즐거웠다. 짧은 하루 속에서도 수많은 문장과 부딪혔다. 때론 위로를 빚졌고, 상처 입기도 했다. 과거는 문장들로 이루어졌다. 어떤 문장이 기억에 남느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위로받았던 문장들이라 말하겠다. 상처를 남긴 문장들은 날카로웠지만 금세 다른 상처들로 덮어버렸다. 


  늦은 밤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받아간 책을 읽으니 기분이 차분해졌다더라. 애정하는 작가의 필명이 전화 너머에서 여러 번 오르내렸다. 코앞에 몇 시간을 앉아서 머리를 싸매면서도, 내가 채우지 못한 위로를 책 속에 찾아냈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언젠가 나를 안도시켰던 문장들에 질투심이 일었다. 나를 위로했던 문장들이 뱃속 깊은 곳에 자리 깔고 앉아 속이 간지러웠다. 소화되지 않은 위로들이 버거웠다. 나의 쓸모를 의심한 하찮은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장을 모은다. 애정해 마지않던 이름들은 못된 심보에 녹슬어 애증이 되고 다시, 비굴한 나는 이러한 문장을 낳는다. 하얀 배경을 발자국처럼 더럽히는 짙은 글자들이 보기 싫어 지웠다가, 다시 한숨처럼 문장들을 뱉어낸다. 멋대로 나를 위로하고, 의심하게 만든 문장들에 대한 알량한 복수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누군가의 앞에서 고르지 못한 말들을 삼키고 싶지 않아서, 손끝으로 읽은 해진 위로들을 흉내 낸다. 오래전 꿈꾼 시인의 근사한 문장은 아니더라도, 겨울의 한가운데서 다가오는 첫눈처럼 따뜻하진 않더라도, 매일 치이는 문장들 속에 섞여 딱 하나 정도는 닿을 수 있길 바란다. 지친 하루 어디쯤 잊을 수 없게 박제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참 통쾌할 텐데. 얼굴 모를 당신들도 언젠가 나로 인해 위로받고, 분하기를 바라는 속 좁은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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