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의 만보걷기 앱 액정에 메시지가 뜨고 색색의 꽃가루가 화면 가득 퍼져갔습니다. 저는 경이로운 자연현상을 보는 듯 대박을 연발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일년 삼백 육십 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만보걷기를 해낸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말이지요!
운동과 내외하던 게으른 제가 만보걷기를 하게 된 계기는 단순합니다. 바로 건강 때문이었어요. 재작년 늦여름, 저희 부부는 남편의 이직으로 인해 서울에서 제주도 서귀포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제주살이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은 마냥 부러워했죠. 안그래도 딩크족으로서 둘만의 알콩달콩한 삶을 한껏 즐기며 살고 있었던 저희 부부에게 제2의 신혼생활을 누리기에 제주도는 더없이 적합해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행으로 잠깐씩 들렀던 제주도와 삶의 터전으로서 머물게 된 제주도는 180도 달랐습니다. 물론 아름답기 그지없는 환경이었지만 섬의 여름은 살인적으로 덥고 습했습니다. 까닭모를 감기몸살기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운 날 이사하느라 힘들어서 그러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노력했습니다만, 어지러움과 경미한 울렁거림을 동반한 몸살기는 이사온 지 석달 넘도록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요. 나중에 들어보니 육지에서 섬으로 이사온 사람들이 섬의 환경에 적응해 가는 흔한 과정이라더군요. 튼튼하게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원래도 잔병치례가 잦아 환절기나 겨울철에는 감기를 달고 살던 저였는데 제주도에 오게 된 첫 반년은 거의 모든 날을 감기몸살과 함께 한 것 같네요.
이러던 제게 귀인이 나타납니다. 바로 제가 자주 가던 서귀포시에 있는 H이비인후과의 원장님이랍니다. 괴팍한 고집이 엿보이면서도 한없이 정이 많으셨던 그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제가 골골거리며 아픈 몸을 끌고 병원에 올 때마다 한결같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아프다고 누워만 있지 말고 좀 움직여라, 집 근처 운동장이라도 걸어라, 아프다고 몸 사리면 병이 안 떠난다, 그러니까 하루에 만보씩 꾸준히 걸어라. 걷기를 좋아하는 편인 저였지만 계속 컨디션이 메롱이다 보니 이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도 딱히 걸을 생각을 안 했습니다. 더구나 만보라니. 천도 아니고 무려 만이라는 숫자의 압도적 무게감이 부담스러웠지요. 그래서 전 의사쌤의 충고를 예예 하고 건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여전히 골골거리며 정기적으로 이비인후과를 들락거리던 어느 날, 의사쌤이 대뜸 진료도 보기 전에 제 눈 앞에 책 한권을 들이미셨습니다.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 란제목. 멍하니 책을 응시하던 저를의사쌤은 강하게 다그치셨어요.
"매일 걸어요. 올해부터는 걸으라고! 그래야 병원 올 일 없어. 오늘 당장 걸으라고! 할거지?"
짜증과 염려가 뒤섞인 선생님의 질책에 당황한 저는 얼결에 네, 해볼게요, 라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감기몸살이 잦아들자 저는 굳은 결심을 하고 운동화 끈을 매었습니다. 그래, 계속 이렇게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살 수 없어. 만보? 까짓거 해보지 뭐!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했던가요? 첫 만보걷기를 전 수월하게 마쳤습니다. 저질체력이라 여겼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힘들지 않더라구요. 마침 제주도에서 계속 백수생활을 하던 차라 남아돌던 시간, 걷기 좋은 올레길 8코스 근처였던 우리집. 조건도 완벽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만보씩 걸으며 저는 서서히 달라졌습니다.
우선 제가 살고 있는 이 섬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만끽하기 시작했어요. 청량한 바람, 가슴 깊숙이 탁 트이는 초록과 황금빛 들판과 시리게 푸르른 바다가 눈에 들어오면서 세포 하나하나가 치유의 에너지로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걸으면서 만나는 꽃나무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익혀가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었어요.
바닷가에 많이 피어있는 연보랏빛 사랑스러운 꽃들은 갯무꽃, 울타리처럼 둘러져있는 나무 사이사이에 핀 향그러운 하얀 꽃은 돈나무, 빠알간 열매가 알알이 맺힌 가로수는 먼나무, 숲길에서 주로 만나는 화려한 푸른 그라데이션이 돋보이는 꽃은 산수국. 유채꽃 만큼이나 길가에 자주 보이는 키작은 진노랑 꽃은 가자니아. 이름을 알게 되어 한층 더 친근해진 꽃나무들과 함께하는 걷기는 고인 연못같은 일상에 참 고마운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덩달아 제 자존감도 높아졌답니다. 매일의 만보걷기 미션을 완료하면서, 만보에 다다랐을 때의 윙 하는 핸드폰 진동음을 보상처럼 음미하면서, 만보걷기 어플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록들을 보면서 나 자신이 매우 대견해진 것이지요. 의지박약의 아이콘인 나도 이렇게 한다면 할 수 있구나. 가족들은 물론 친구, 지인들도 열렬히 저를 응원하고 격려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저를 지켜본 남편조차 저보고 무려 존경스럽다는 찬사를 보냈답니다.
자신감은 또 다른 도전들을 낳았습니다. 이번엔 하루 책 한권씩 읽는 습관을 들여봐야지! 2년간 쉬어왔던 바이올린 레슨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어라, 이런 공모전이 다 있네, 한번 응모해봐야지. 떨어지면 어때? 일단 해보는거지 뭐. 다짐으로만 그치지 않고 전 모든 것들을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제 안에 구겨진 채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에너지들이 만보걷기를 계기로 하나 하나 깨끗하게 세탁되고 다림질까지 완료되어 온 세상에 발산되는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애초에 제가 걷기를 시작하게 된 강한 동력이었던 건강에 관해 말씀드려야겠네요. 만보걷기를 하는 동안 전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는 훈훈한 팩트를 알려드리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아, 살은 얼마나 빠졌냐고요? 슬프게도 모든 다이어트의 근본은 식이조절이라는 걸, 제아무리 격한 운동도 폭식 한번에 무용지물이 된다는 진리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다이어트보다 훨씬 값진 열매를 얻었답니다. 나 자신에 대한 긍정이지요. 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에 아침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일 양쪽 팔, 양쪽 다리를 내 의지대로 힘차게 움직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감사하곤 합니다. 이 순간 살아있다는 느낌, 그리고 오늘도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에 말이죠. 더불어, 저를 만보걷기라는 멋진 세계로 이끌어주신 H이비인후과 원장님께도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밥먹고 숨쉬듯 제 일상의 당연한 일부분이 되어버린 만보걷기,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이 멋진 습관을 여러분들에게도 제안합니다. 함께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