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차이

죽음을 멀리하면 안 되는 까닭

by 최길성

15년 전 죽음의 문턱에 들어가 본 일이 있다. 아들과 치킨을 시켜 먹고 갑자기 얼굴이 충혈되고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싶었다. 아내가 급히 119를 불러 성모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나를 본 담당의사는 '생명이 위독하니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곧바로 인공호흡기에 생명을 의지한 채 응급차에 실렸다. 뜻하지 않는 죽음의 근사체험이 시작된 것이다. 머릿속에는 온통 초등 3학년이던 아들 생각뿐이었다. 아빠 없는 어린 아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경을 헤매는 고통의 순간이 30분이나 지나 아주대학병원에 도착했다. 검은 옷차림의 저승사자들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 죽음의 문턱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시간 같았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 곁에 함께 있다. 생명체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툭하면 '아~휴 죽을 뻔했네!'를 내뱉으며 사는 모습이 죽음과 함께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 수명만 놓고 보면 하루 삶은 하루의 죽음을 경험하여 얻는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루의 삶이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소중한 선물이 자신에게 안겨진 셈이다. 누구나 인생을 대충 살아선 안 되는 까닭이다.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주는 소중한 깨달음이 아닌가 싶다.


급체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체험은 별로 특별한 일이라 할 것도 없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죽음의 끔찍한 공포를 겪으면서 넋을 잃고 온 몸이 굳어버린 적이 있다. 포항공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다녀오던 중 고속도로 경산에서 일행끼리 부딪친 사고가 있었다. 차선을 넘어 고속도로 밖으로 자동차 두 대가 곤두박질치는 대형 참사였다. 3명이 목숨을 잃고 4명은 겨우 생명만 건졌다. 30년 지난 사건이지만 정말 끔찍하고 처참한 사고였다. 사고의 악몽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노화와 병으로 먼저 떠난 고인들은 셀 수 없다. 장인 장모님이 25년 전에 떠났고 부모님도 9년과 7년 전에 떠났다. 대학에서 과제를 함께 하던 동료가 하루 밤 사이 참사를 당한 경우도 있다.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고향 친구가 허무한 숨결로 사라지는 참담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게 된다. 내 삶 또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새기게 된다. 삶과 죽음이 별개인 양 믿고 살아온 지난 시절이 또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모를 뿐 죽음은 언제나 나 곁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일이다.


'너도 언젠가 죽는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우리를 위축시킨다.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에게 삶을 옥죄고 죽음을 기만하게 만든다.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모순된 삶을 살게 만든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그런 모습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다. 그 속에는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언급하는 것조차 재수 없는 말처럼 생각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을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 한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는 것을 잃을까 두려운 것이다. 가족을 잃을까 두렵고 혼자 남겨지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두렵고 모아둔 경험과 재산이 없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겁이 나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 기억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고 쌓아둔 것이 없어져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죽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죽기까지는 죽음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죽음을 생각할 시간도 죽음을 두려워할 시간도 없다. 죽음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두려운 것이다. 현재와 죽음 사이의 간극이 있기에 그에 해당하는 시간이 있기에 미리 겁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커다란 가르침도 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공명정대하게 살라는 교훈을 주게 된다. 사심이 없이 밝고 커다란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가장 소중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유한한 삶이 주는 또 하나의 가르침이 불멸의 형상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이들이 종교인들이다. 극락과 천국의 환생을 믿고 의지하려는 사람들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삶에서 못 이룬 소망을 다음 생애로 가져가고 싶어 한다. 불가항력의 삶을 신앙에 기대려는 심리로 이해할 수 있다. 유한한 삶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 신앙이 지배하던 중세 같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반면에 현실과 내세로 구분하여 육체와 영혼을 이탈 가능하다는 비과학적인 논리에는 무턱대고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오대양 사건처럼 신앙이나 교주의 주장에 맹신하여 집단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다.


현실 사회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현실 삶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일 따름이다. 자신의 삶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바라보고 마주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삶과 죽음을 고립시켜 놓고 보면 안 될 성싶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매 순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고 소멸로 인식하는 것부터 고쳐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경건한 마음부터 인식을 바뀔 필요가 있다. 죽기 싫다고 살려고 발버둥 치려는 자세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죽음에 눈을 감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 상으로 3년 동안 묘지살이를 하던 가족을 볼 수 있었다. 생과의 이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죽음을 멀리 하지 않으려는 풍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현재도 미국이나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은 도시 한복판이나 번화가에 공동묘지가 있다. 어둡고 으슥한 죽음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친근하고 평화로운 공원처럼 여기고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차이가 있다. 주거지역 인근에 납골당 설치 반대를 위한 격렬한 시위로 벌이는 한국사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장례문화도 죽음을 터부시 하는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3~40년 전만 해도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을 가족들이 함께 지켜보는 풍습이 있었다. 이별의 아쉬움과 슬픔을 경건한 마음으로 마주했던 것이다. 산자와 사자의 이별을 자연스럽게 공유했던 셈이다. 아름다운 작별 인사로 삶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장례문화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대부분 호스피스 병원에서 고독한 최후를 맞는 형편이다. 평생 동안 사랑하던 가족들과 격리된 채 고독한 시간을 보내다가 끝내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허망하게 떠나고 만다. 연명 기술을 돈벌이 수단으로 바꿔놓은 현실사회가 장례의식조차 파묻어버린 셈이다.


사나운 맹견이 달려들 때 눈을 감거나 달아나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화를 입고 만다. 죽음의 두려움을 대처하는 법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연명치료를 받으며 생사를 넘나들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외면한다고 자신의 마음이 평온해질 리 없다. 망자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픔과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마지막 떠나는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데 후회막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작 깨달았다면 지금처럼 후회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보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 누구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돈과 명예, 권위를 미친 듯이 쫓으며 살고 있다. 출세와 성공만을 추구하며 악착같이 안간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욕망의 노예나 다름없다. 돈에 눈이 멀고 돈에 귀가 어두워 돈에 얼굴이 두꺼워진 삶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죽음이 묻는 듯하다. 새장 속의 새처럼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대자연 속의 삶을 산다고 말하는 우리들에게 죽음이 꾸짖는 듯하다. 메멘토 모리는 우리에게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왜 죽는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죽음만이 우리에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살라고 권유할 수 있는 위대한 스승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후회 없이 멋진 삶을 살라는 가르침으로 죽음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오늘'이다. 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오늘이다.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어도 그들에게 없는 오늘이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내 임종의 순간에 삶을 뒤돌아봤을 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 오늘이다.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 돈이 아니다. 삶을 흘러가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행복은 달라진다. 시간을 즐기는 법을 알아야 사는 게 즐겁다. 내 인생을 아름다운 소풍처럼 왔다 떠나고 싶다. '가족과 함께 했던 인생 소풍이 참 행복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이 내 마음속에 새겨두고 간직하고 싶은 묘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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