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웠던 내 모습

손주에게 배운다

by 최길성



알에서 깨어난 오리새끼는 처음 보는 대상이 어미인 줄 안다. 강아지를 졸졸 따라다니는 오리 떼를 본 적이 있다. 생명을 지닌 유기체는 생존을 위해 누군가에게 의존한다. 배우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신생아도 마찬가지다. 지능이 미처 발달하지 않았는데도 생존 본능이 있다. 자신의 생존에 유불리를 가려내는 낯가림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생 후 몇 개월이 지나 사람을 알아볼 때가 되면 아이는 낯가림을 하게 된다.


아이마다 차이는 있지만 낯선 사람은 경계를 하면서 유난히 따르는 사람도 있다. 아이의 무의식에 안정을 감별하는 촉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손자와 손녀가 그랬던 것 같다. 손자를 키울 때에 비해 손녀의 낯가림은 덜한 편이었다. 보챌 때 안아주고 달래준 것은 똑같았어도, 동생이 오히려 더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 손녀가 할아버지는 유난히 따르는 편이었다. 주변에 돌봐주던 사람이 여럿인데도 잠투정으로 보채는 아이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음을 알게 됐다. 아빠나 할머니, 이모나 삼촌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잠 덫으로 칭얼대가도 안아서 어르면 ‘뚝’이었다. 쉽게 안정을 찾아 잠에 빠지는 것이었다. 엄마도 달래기가 어려운 까다로운 아이가 내 품에 안겨 잠드는 모습이 참으로 놀라웠다. 최면에 걸린 아이가 되는 것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평소 아이를 예뻐하고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손자를 돌보느라 올챙이송으로 수천 마리 올챙이를 개구리로 키워냈고, 손녀를 재우기 위해 섬집 아기 손녀에게 수백 번 자장가를 반복 재생시키기도 했다.


낯가림이 심하던 손자를 볼 때는 진땀을 흘린 적이 여러 번이다. 아무리 안고 업고 해도 소용없었다. 반면에 손녀의 육아는 훨씬 편하고 수월했다. 덕분에 여유롭게 아이를 돌보아 줄 수가 있었다. 끈끈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두리번 대기 시작하여 내 눈과 아이 눈이 마주치면 안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손을 허공에 휘젓는 동작이 안아달라는 신호였다.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방으로 소리 없이 기어와 고개를 들고 낑낑거린다. 아는 채 하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엄마의 손길을 대신할 정도로 가까워진 내게 드디어 육아를 전담할 기회가 왔다. 젖 먹이 수유 중인 엄마가 아이를 떼놓는 일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딸의 심리 상태가 불안한 상황이었다. 육아에 지쳐 몹시 힘들어하는 상태였다. 일과 육아에 매달리는 워킹 맘이 흔히 겪는 번 아웃 증후군을 앓는 상태였다. 딸이 안쓰러워 휴식 시간을 주어 추스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해서 동생과 함께 2박 3일의 대만 여행을 보내주었다. 자매 여행을 다녀온 후 딸은 다행히 호전되었다. 결국 할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하던 손녀가 엄마에게 고마운 선물을 준 셈이었다.


그토록 친밀한 애착관계를 느꼈던 손녀가 5살이나 됐다. 못하는 말이 없을 정도로 또박또박 자기 의사 표현을 잘할 정도다. 그런 손녀에게 지난날 할아버지와 추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에 흐릿한 기억 조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해외에 떨어져 살아서가 아니다. 아이의 기억과 경험은 3살 이후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첫 돌이 지난 아이가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고 한국을 다녀갔어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손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집착하고 의지했던 행위들은 무의식에 의한 본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 무의식에 의존하던 영아 시절은 알지 못한다. 자신을 헌신적인 보살펴주고 사랑을 베푼 은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키워준 은혜는 모르는 일이 되고 만다. 부모의 소중한 사랑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조각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때문에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모의 뇌에만 남아있는 아이의 추억은 자신이 부모가 되어야만 소환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면 내게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아이의 온전한 성장과 발육을 위해 부모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지 체험을 통해 알게 된다. 부모의 몸과 마음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의 존재와 아이의 안녕은 먼저 챙겨야 한다. 아이의 건강과 생존이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부모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자신을 위한 온갖 행위를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한다는 참된 사랑을 깨닫게 된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날 때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라고 심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 생명의 탄생은 가장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고귀한 존재가 자신의 '삶'에 있음을 뜻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귀중한 의미는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부모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유일한 생명체다. 그러한 생명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기쁨이고 감동일 수밖에 없다. 내 삶에서도 세 자녀가 탄생했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의미가 담긴 순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자식은 내게 품 안에 있는 동안 이미 값진 선물이 다 준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자신은 자기가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부모에게는 감탄과 경이의 순간을 선사한 셈이다. 영아시절을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충분한 보답을 선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을 만큼 존귀한 존재로 태어난 자체가 충분한 보상인 것이다. ‘자식은 3살 때까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의 절반 이상을 준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듯하다.


인간의 정이 점점 메말라가고 부모님 은혜에 보답은커녕 부모를 홀대하는 세상이라고 비난의 목소리가 들린다. 혈육의 관계마저 이해타산을 따지는 관계로 돌변한 삭막해진 현실이 안타깝다.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곰곰이 성찰해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아름답던 시절을 기억할 수 없다고 그런 시절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자신이 부모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다고 부모의 사랑을 외면하면 서글픈 일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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