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이 더 소중한 까닭

삶을 대충 살면 안 되는 이유

by 최길성

요즘 손주 바보로 산다. 손주는 삶에 많은 깨달음을 준다. 나와 내 가족에게 행복의 진원지가 손주들이다. 손자 Ian와 손녀 Ina가 있기에 온 가족이 행복한 날들을 지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주가 생긴 집안은 대부분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처럼 먼저 휴대전화 주인공 사진이 손주 얼굴로 바뀌게 된다. 가족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손주로 넘어가는 셈이다. 손주가 가족의 존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변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내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새로운 인격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보다 귀중한 일도 없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리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존재가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일이다. 그보다 더 감격스럽고 축복할 만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나 자신의 존재 근거가 서서히 잊히고 있을 때 손주의 탄생은 벅찬 감정으로 다가왔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모가 떠난 부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잉태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잊고 있던 근원이 어디서 새롭게 나타나 혈육의 정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일회용으로 살아갈 인생임을 깨달을 즈음. 종족 보존의 본능이 살아난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큰 가슴 벅찬 감동과 환희의 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덧없던 인생에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현재 지구 반대편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손주들이 살고 있다. 손주들 모두 스웨덴에서 태어나 그곳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영유아 때에는 보고 싶을 때 찾아갔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만나질 못했다. 항로가 막혀 영상통화로 그리움을 이따금 달래고 있다. 어느새 개구쟁이 손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참 재롱을 떨고 있을 손녀는 유치원 DAGIS에 다닌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품에 안길 것 같은 손주들이 너무 그립고 보고 싶기만 하다.


주말 저녁이면 기다리던 페이스 톡 영상 통화음이 울린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이 식탁이나 거실에 앉아 놀고 있다가 연결된 영상통화다. 손주의 웃음 띤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이면 으레 눈물주머니가 먼저 주책을 부린다. 나도 모르게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이 반응을 한다. ‘할아버지 눈에 눈물이 왜 나와? Ina할아버지가 울면 Ina도 슬퍼지잖아.’한다. 4살 된 손녀가 내 눈을 보고 내뱉는다. 젖 먹이 때부터 유난히 따르던 손녀인데 우리말을 곧 잘한다. 할아버지를 언제 봤다고 친한 사람처럼 교감을 느끼기라도 하듯 애교를 떤다.


자식 셋을 키우는 동안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색다른 감정이다. 자식을 키울 때는 일과 공부에 쫓겨 살다 보니 육아에 별로 겨를이 없었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나 관심이 덜 했던 것이 사실이다. 육아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미흡하여 실수투성이로 아이를 돌보던 지난날을 부정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자식들에게 미안함뿐이다. 지난 양육 시절이 후회되고 아쉽기만 하다.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을 마음껏 베풀지 못한 회환의 마음뿐이다. 손주에 대한 내리사랑을 통해서 새삼 성찰하는 바가 아닌가 한다.


부모로서의 삶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전부나 다름없다. 자녀가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하여 독립을 돕는 일이 결국 부모로서의 삶이고 부모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는 일이다. 딸 둘을 독립시키면서 내 삶에 대한 감회가 그렇게 느껴진다. 부모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잠시뿐이었다. 손주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결혼으로 독립한 자녀 세대의 빈 공간을 매워주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 문화의 형성과 새로운 행복의 샘물이 생겨난 것이나 다름없다.


육아와 양육은 어떤 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아울러 삶에서 그 보다 중요하고 값진 일도 없다. 최고로 어려운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엄밀히 말하면 어린아이 양육자는 참사랑을 실천하는 위대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아끼는 마음가짐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쏟아내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실현하기가 불가능한 일이다. 내리사랑을 통해 얻게 된 값진 깨달음이 이것이다.


부모의 참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부모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답으로 선사한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보답한다. 부모의 양육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몸짓으로 갚는 셈이다. 이는 자녀를 키울 때는 미처 깨닫거나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현실에 치어 기억에서 멀어졌다는 표현이 더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일 성싶다. 이조차 손주에 대한 내리사랑을 느끼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이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들만큼 아이는 축복을 받고 태어난 존재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을 대충 아무렇게나 살아선 안 되는 까닭이다. 누구나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서 축복받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는 부모님의 온갖 정성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키워진 존재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부모님의 애지중지한 참사랑을 받고 자란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존중받을 충분한 권리를 지닌 존재임을 가끔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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