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배워야 할 삶의 지혜

아이들이 마냥 즐거하는 미래 사회를 꿈꾸며

by 최길성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집에서 4~5 살 되는 아이들 십여 명이 선생님들과 함께 모둠으로 나뉘어 나들이를 하고 있다. 단지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맨 앞 아이의 눈이 내 눈과 마주치자 '안녕하세요~'하며 큰 소리를 외쳤다. 그러더니 뒤에 따라오는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안녕하세요~'라고 소리를 외쳐댄다. 나는 얼떨결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러분! 안녕하세요~'감동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노란 티와 바지를 입은 아이들 열이 총총걸음으로 이동할 때까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홀함에 사로잡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자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부모가 동생이 생기자 육아휴직으로 1년 동안 한국에 와 있을 때였다. 스웨덴에서 DAGIS에 다니던 손자를 근처 유치원에 보낸 것이다. 선생님 대신 내가 '잎새반을 부르면~'하고 선창을 하면, 손자 녀석은 '네~네~ 선생님'하고 큰 목소리로 답을 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무런 목적이나 거리낌 없이 소릴 지르는 시기가 있다. 4~5살 무렵이다. 자아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세상 밖을 향해 자신의 맹목적인 목소리를 내곤 할 때다.


손자가 4살이 되던 해 여름날. 스페인 Ronda에 여행을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숨이 탁 막힐 정도로 뜨거운 스페인의 여름 날씨였다. 한 낮 불볕더위에 지쳐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였다. 어느 광장을 관람하던 중 갑자기 손자 녀석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조그만 손에는 숟가락 모양의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 가족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관광객들 시선도 동시에 아이를 향해 멈춰 서 있었다.


여행객의 시선을 빼앗은 손자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신이 나 있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배운 아이의 노래는 아빠가 틀린 부분까지 덩달아 틀리게 따라 불렀다. 흥이 날대로 난 상태로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아이의 돌출 행동이 순식간 모든 관광객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 순간 손자의 행동은 비디오 플레이어 'pause'기능과 똑같았다. 바삐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잠시 멈춤'으로 정지시켜 놓은 느낌이었다. 아이의 무의식인 행동은 삶의 철학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순수한 모습은 신의 영역에서 금방 나온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아름다운 모습은 신의 향기라 할 만하다. 그런 존재에게 종교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어른들 편의의 질서를 가르친다. 아이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라 하지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나도 몰래 순연해지는 경우가 있다. 맑고 깨끗한 아이의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의 만사를 돌아보게 된다. 인격체로서 오염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들이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은 결국 세속에 물들어 가고 있음을 뜻한다. 부모나 사회가 아이의 맑고 깨끗한 영혼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순자의 성악설을 믿는 편이지만, 손자를 보면 인간의 성품은 원래 선하게 태어난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는 선행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이 성선설이기도 하다. 대가가 없어도 스스로 억울하거나 약자를 돌보려는 동정심을 지닌 것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아이를 보면 새롭게 느껴진다.


아이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은 고차원적이다. 어른들이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마주하는 방식이 상투적이라고 한다면 아이의 방식은 사유적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아이들 눈에는 태어나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처음 대하는 것들이다. 마냥 신기하고 궁금한 것들 밖엔 없다. 처음으로 먹어보고 처음 듣고 처음 만져보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풀이든 나무든 돌멩이든 모든 만물이 신비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부모의 손길을 따라 걸어가는 아이가 눈이 가는 곳마다 발 길을 멈춰서는 까닭이다. 하지만 신기해서 만져보고 바라보고 싶은 아이의 관찰력과 상상력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만다. 부모님들의 바쁜 발걸음에 맞춰 서서히 퇴색되어 간다.

손주들이 유아원과 유치원 다닐 때였다. 오가면서 주운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놓질 않는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애지중지 할 때도 있고, 풀잎 몇 조각을 챙기려는 때도 있다. 아무렇게나 생긴 돌멩이를 주어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아이 모르게 슬그머니 꺼내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다. 기다렸다가 물어본 후 상의 절차를 밟은 후 아이 스스로 버리게 했다. 아이가 사물에 특별한 교감을 느끼거나 의미를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이 궁금하니 지나치지 않을 뿐이다. 아이의 시선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시선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나 다름없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를 맡으며 온전한 감각을 열어놓을 줄 안다.


현실사회가 아이에게 배우고 깨달아야 할 점들이 참 많다. 무엇이든 소유로 만들어 행복을 추구하는 자본사회의 민낯부터 아이의 하얀 마음의 거울에 비춰보았으면 좋을 성싶다. 자신의 가치를 소유물과 동일한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우리들 모습도 마찬가지다. 소유와 소비를 생존의 원리로 알고 삶의 전부로 여기는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오 보인다. 어떤 아파트에 살고 몇 평에 사는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관심이 쏠려 사는 모습이다.


동산이나 부동산에만 소유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나 경험도 소유욕이 강하다. 자신의 사고나 생각을 자신만 가질 수 있는 소유로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기억한 사고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이기적 편향에 불과한 편견이나 고정관념 따위에 집착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치우친 사고조차 신념이나 가치관으로 고집하려고 한다. 자신의 의식을 바꾸면 큰일 나는 것처럼 아까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나이가 들수록 보수 성향이 강해지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삶의 양태가 소유에 의한 삶의 방식이라면, 아이가 태어나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존재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늘 즐겁고 행복하듯이 생명체로써 성장하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삶의 방식이 존재방식의 삶이다.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도 지나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눈길과 태도는 물론 아이들의 일상적인 삶의 전부가 존재방식의 삶이다. 사람이나 사물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줄 아는 삶이다. 사물이 눈에 띈 순간마다 신비롭고 놀라워한다. 꽃을 꺾어 화분으로 옮기려 하지 않고 꽃 한 송이를 보기만 해도 그저 예뻐하고 꽃 자체가 지닌 모습을 즐길 줄 아는 근사한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성장과정을 보면 굳이 철학자 에리히 프롬에게 사랑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사랑으로 인한 실패나 상처는 소유적 사랑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소유적 사랑은 연인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집착하고 족쇄를 채우려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의 노예로 변질되어 의처증이나 의부증을 앓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에 존재적 사랑은 청춘시절 연애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애틋하고 설렌 마음으로 마주하는 사랑이다.


자신에게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삶이 생동감 넘치고 활기찰 수밖에 없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대하는 사랑이 존재방식의 사랑이다. 깊은 정으로 감싸주고 존중해주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해주는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향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랑에서 꽃은 행복할 리 없다. 아름답던 꽃도 지고 나면 슬퍼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꽃이 세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을 느낄 줄 아는 삶이 행복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연에게서 얻고 깨닫는 것이 많이 있는 것처럼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아름다운 모습에서 깨닫고 반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아이들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재잘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안전한 세상에서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쩍한 사회라야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은 지금 세계 최저 출생률 국가에 처해있다.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생태계가 위험에 처한 심각한 위기 상태인 것처럼 어린아이가 부족한 상태다. 현재 처해진 환경에서의 현실 생존을 위해 미래 세대의 꿈과 희망은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실업과 주거부담으로 결혼문제부터 해결해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육아로 인해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지고 마는 현실사회에서 육아는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양성평등의 육아휴직제도나 아동수당, 공보육 제도 등 육아제도의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한 국가정책을 개선해야 할 것 같다.


keyword
이전 16화욕망과 좌절의 상징 '부동산 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