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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Jul 23. 2023

자식 농사가 힘든 이유

자식 때문에 속상한 부모들에게

    인생 후반 손주 보는 재미만큼 쏠쏠한 일도 없다. 젊은 시절에도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손주들이 태어나고부터 최애 관심사가 손주들이 될 수밖에 없다. 틈만 나면 손주 이야기로 손주 자랑에 빠진 팔불출 할아버지로 살아갈 수밖엔 없었다. 그러던 중 세 번째 손자가 등장한 것이다. 사돈 내외가 무척 기뻐했다는 말에 한시름 놓은 기분에 날아갈 것 같다. 요즘은 아침마다 그 손자 녀석을 보러 대전에서 세종으로 출근한다. 몸은 묶여 바빠졌어도 마음은 하루하루 설레고 흐뭇하기만 하다.


    자식을 키울 땐 지금처럼 내리사랑에 빠져 지내진 못한 것 같다.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정작 소중한 가치는 잊고 살아온 느낌이다. 손주들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에서 새삼 내리사랑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원인이 아닐까 싶다. 자식한테 못다 한 정이 아쉽고 미안한 마음에서 손주들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자식보다 손주가 더 깊고 특별한 애정과 애착을 느끼게 된다. 손주는 보기만 해도 으레 눈물이 난다. 반가움과 감격의 눈물이 나도 몰래 흘러나온다. 내리사랑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 아닐까 한다.


    스웨덴 사는 손주들이 여름휴가를 왔다 며칠 전 귀국했다. 한 달 여 북적대던 집이 텅 비니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손자가 화가 나서 울던 울음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아 더 울적하다. 신나서 노느라 떼쓰다 몇 번 야단맞아 울음을 터뜨렸던 손자 녀석이다. 억울하고 분함을 참지 못해 고함치며 울던 모습이 내내 안쓰럽다. 손주 사랑을 낙으로 삼는 내게 어린 손주의 상처는 섭섭하여 애가 타는 일이다. 부모를 추궁하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가 자식 농사에 참견하는 일은 불화인 줄 뻔히 알면서 어쩔 수 없었다.


    가장 힘든 농사가 자식 농사이다. 마음대로 키울 수 없는 게 아이들이다. 충동과 호기로 불안한 아이를 억압하면 저항도 커지기 마련이다. 자식 농사에 시행착오와 부작용으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씨앗만 뿌릴 줄 아는 초보 농부에게 기다리는 여유 이외에 별다른 해법은 없어 보인다. 아이 스스로 진정시켜 평상심을 찾을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려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한다. 틔운 싹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게 농부처럼, 아이의 학습 과정을 보살피는 것이 부모의 행복한 삶이 아닐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이의 생존력은 태어난다. 신생아는 울음소리 하나로 탄생과 욕구불만을 표현하여 삶을 지킬 줄 안다. 손자처럼 2개월이 지나면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 표현을 시작한다. 우유를 먹이고 씻고 기저귀를 갈아 기분이 좋으면 청색신호다. 눈에 미소가 들어있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노랠 부르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으~응 이~응 옹알이를 한다. 순둥이 같은 손자 녀석이지만 적신호로 바뀌면 표정이 변한다. 보채고 소리 지를 땐 성난 주인이 호통치는 모습이다. 차분하게 진정되길 기다리며 달래 주는 게 상책이다.


    자식 농사가 어렵고 힘든 까닭은 참고 달래도 부모로서 능력밖에 있을 때다. 아이가 놀라서 의식을 잃거나 고통스러워 울지만 부모가 감당하지 못할 때다. 전문의사가 아닌 이상 난처하고 불안해도 한계에서 벗어난 경우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성장통을 겪는다. 새로운 감정이나 행동을 학습하여  달라질 때마다 진통을 겪기도 한다. 체온이 오르거나 경기도 하여 부모를 애태우며 진땀을 흘리게도 한다. 특히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인한 경기나 고열은 아이를 위협하는 위험 신호에 해당한다.


    아이는 본능에 동기화되어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본능이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는 불안을 제어하지 못해 갈등을 겪는 아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공포나 위협에서 보호 본능을 상실하면 위험하다. 부모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부모가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노여움으로 키우는 부모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폭력이나 억압을 견디지 못해 고통을 받는 아이들이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반면교사로 성인이 된 부모가 반면교사로 아이를 키우는 격이다. 이상심리나 충동적 심리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안한 부모가 건강하고 안정적인 아이로 성장하길 바라는 셈이다. 아이 양육이 어렵고 힘든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자신은 욕하고 미워하는 힘으로 현실을 살아가면서 아이 양육만큼은 과욕을 부리는 모순된 현실이 아닐까. 사랑과 미움, 복종과 반항, 관용과 처벌 사이에서 숱한 갈등을 겪는 부모로서 살았다고 아직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반면교사를 미워하고 파렴치한 그들의 태도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토록 혐오하고 증오하던 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수없이 외치고 떨치려고 살아온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부모의 나쁜 유전자는 그대로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유전자를 아이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다. 내 아이를 잘 키우는 부모가 되려 한다면 깊은 성찰과 남다른 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뭐든지 잘 가르치려면 잘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 한다. 육아를 잘 모르는 육아를 잘 해낼 리 만무다.


    건강하고 안정된 아이로 성장을 원한다면 아이의 눈높이부터 이해하고, 눈높이에 맞는 양육 태도를 부모가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억압과 폭력으로 다그치는 행위는 양육이 아니라 아이를 망치는 길임을 먼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정신적 트라우마나 심리적 방어기제가 악행의 근원이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 경험이 풍부하고 뛰어난 사람도 불안과 충동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언제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한  충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원인이다.


    나이 들면 아이처럼 된다. 어린아이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천진한 아이의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 때문이다. 아이 양육을 그런 평정심을 기본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행동할 줄 아는 아이를 가르치려면 아이가 지닌 평정심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키우려면 분하고 섭섭하여 화가 치미는 감정부터 깨끗이 비워야 하지 않을까. 불행과 고통에 빠뜨리지 않는 온전한 아이로 키우려면 적어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다리고 참아주고 믿는 마음으로 아이를 키워야 반면교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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