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5: 초여름의 동치미
누군가 그랬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서도 거짓말을 쓴다고.
거짓까진 아니었지만 스스로에게 세우고 싶은 체면이 있었던지, 나 역시도 일기장에 눈에 뻔히 보이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시치미 속엔 이미 끝을 알고서도 애써 모르는 체하는 마음과 벌써 저질러 놓고선 발뺌하는 내 모습들이 섞여 시큼한 냄새가 났다.
삶의 여러 가지 갈래 중 한가닥을 잡아 내 미래를 묶어두는 것보다,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무언가로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꽤나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도 알아가고 있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고, 몸과 정신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마음의 허탈함에 시달렸다.
어떤 한 가지를 선택한다는 건 남은 것들을 철저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체했던 내 '시치미 떼기'의 최후이다.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던 석 달의 봄 동안, 무릎 통증을 참아가며 새하얀 빛깔로 담아준 엄마의 겨울 동치미가 초여름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거품을 방울방울 밀어 올리는 동치미를 그릇에 담아 한 입 두 입 먹어본다.
짠맛이 익어 농후한 신맛과 무의 달큼함이 가득 올라온다.
문득 엄마의 동치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설펐지만 결국엔 나 다운 본연의 맛을 내는 솔직하고 인내심이 가득한 동치미.
아직 제 맛을 내기엔 한참이란 걸 알고 있다.
줄곧 한 곳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마음의 가지들을 잘라내고 한 가지를 선택했다.
상상했던 나쁜 감정은 올라오지 않았다. 이전보다 내가 집중해야 할 곳이 또렷하게 보였다.
당장 오롯한 마음의 기준까지 심을 순 없었지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고요함이 조금씩 차올랐다.
점점 내 세상의 평온함을 찾아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긴다.
초여름이 시작되었지만 봄과 마찬가지로 바깥은 늘 정신없이 돌아간다.
겨울에 보내준 동치미가 아직도 있냐며 엄마한테 한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이런 시치미를 떼보고 싶어 진다.
왜 이렇게 여유롭냐는 물음에, 바쁘게 살 시간이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