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4: 닭장떡국
경상도가 본가인 나는 명절에 만두를 빚어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인지 새해나 명절 때 집에서 소를 직접 만들어 식구들끼리 도란도란 모여 앉아 만두를 빚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건 또 어떤 맛일까 하고 먹어보지 않은 추억을 상상해보곤 했다.
나는 늘 떡국을 외할머니댁에서 먹곤 했는데, 외할머니의 떡국은 특별했다.
으레 떡국은 사골육수로 국물을 내어 소고기를 고명으로 얹거나, 디포리로 멸치육수를 우려 맑은 떡국으로 끓여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내가 먹어온 떡국은 보얀 사골국물도 투명한 멸치국물도 아닌, 그 어디 중간쯤의 농도를 가진 '닭장떡국'이었다.
외할머니의 떡국은 투박했지만 정이 듬뿍 담긴 뜨끈함이 있었다.
차지고 쫄깃한 뽀얀 떡국살 위로 뼈째 다져진 닭장이 올려졌고, 샛노란 계란지단 하나 없이 곱창김을 부숴 흩뿌린 것이 고명의 전부였다. 닭 껍질까지 조려 국물은 적당히 기름지고 고소했으며, 짭조름한 닭장은 맹맹한 쌀떡을 계속 입안으로 불러들였다. 닭장은 아침상의 떡국뿐만 아니라 저녁상에서도 존재감을 빛냈다. 도라지, 고사리, 무, 콩나물 등의 명절나물에 참기름을 듬뿍 넣고 닭장을 조금 섞어 비벼주면 이것도 어디서 쉽게 맛볼 수 없는 외할머니만의 별미 비빔밥이 되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닭장을 만들지 않으신다.
엄마는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는 외할머니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늘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시는) 외할머니와는 도무지 대화란 게 되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하곤 했다. 어느 날도 엄마의 넋두리를 듣다가 "엄마, 외할머니한테 닭장 만드는 법 배워와. 나 외할머니 닭장떡국 먹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러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정말로 닭장을 만들어 서울로 보내왔다!
엄마의 닭장은 외할머니의 닭장과는 조금 달랐다. 엄마의 닭장은 알이 훨씬 굵고 (엄마는 집에서 닭뼈를 잘게 부수기 힘들다고 이미 예고했다.) 외할머니의 닭장보단 덜 짰으며, 마늘맛이 조금 더 올라왔다. 가끔 보이는 통닭 크기의 닭조각을 보고 참 엄마답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음식에 있어서만큼은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엄마의 닭장도 외할머니의 닭장만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내줬던 숙제는 곧 언젠가 나의 숙제가 되겠지.
닭장떡국이 전라도 음식이라는 건 최근에 알게 되었다.
토종닭을 잡아 만든 별미 중의 별미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한 음식이란다.
경상도 토박이에 다른 곳에선 살아본 적도 없는 외할머니인데 어떻게 전라도식 떡국을 끓이게 되었을까 싶었지만, (엄마와 추리해 본 결과) 진주가 지리산을 경계로 나름 전라도와 가깝지 않냐는 결론을 내보았다. 이번에 외할머니를 보게 되면 꼭 물어봐야지. '할머니 왜 닭장떡국을 만들게 됐어요?'
닭장의 레시피는 아직 전수받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 화관을 손수 가위로 잘라 만들던 아름다운 사람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마름모꼴 계란 지단과 빨간 실고추 고명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