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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영 Aug 01. 2023

한여름의 땡초장

Ep 06: 여름을 나기 위한 작고 매서운 다짐

한여름, 위풍당당 매서운 땡초장의 계절이 왔다.




집 밥상에 이 작고 매서운 검은 물 종지가 올라오면 그제야 여름이, 그것도 뙤약볕의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한여름이 왔다는 걸 알았다. 멸치를 우려낸 육수에 간장을 섞고, 청양고추와 조선쪽파를 종종 썰어 수북이 올려두고 반나절을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숙성시켜 두면 끝이다. 더위와 습도에 입안마저 텁텁해지는 8월, 찬물에 밥을 말아 짜디짠 간장물과 매섭게 다져진 청양고추, 조선쪽파를 밥숟가락에 톡톡 얹어 입안 가득 쑤욱 넣어준다. 저염식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가끔은 짜고 매운 것이 사람을 살린다.


7월의 막바지, 느닷없이 집을 박차고 나가 밤 10시에 청양고추 10 봉지를 사 왔다.

여름이 가는 것도 아쉬운데, 제철 음식마저 못 먹는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배가 되었다. 더욱이,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맵고 알싸한 땡초장이 꼭 필요한 요즘이었다.

40개가 넘는 청양고추를 세로로 갈라 씨를 털어내고 새끼손톱의 반보다 작은 크기로 일일이 다지기를 반복한다. 손톱 밑이 화끈거리고 눈 주위가 불긋하게 아려온다. 액젓을 넣은 육수에 양파, 다진 마늘, 다진 청양고추와 홍고추를 넣고 자박자박해질 때까지 졸여낸다. 마지막에 참기름을 살짝 떨어트리고 한 김 식힌 후 냉장고에 넣으면 끝이 난다. 그렇게 눈물로 지새운 사연 많은(?) 땡초장이 새벽 3시에 완성됐다.


반복되는 사건 사고는 그저 통계적 확률의 우연일 뿐이며, 점과 미신은 ROI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믿는 나지만 최근 갖은 골치 아픈 일들로 왕소금이라도 뿌려대야 하나 싶었다.

토요일 이른 새벽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119에 신고를 하고, 2주간 수요일마다 차사고가 나고 (무려 3년간 연속으로 여름에 내가 탄 차가 들이 받히는 사고가 일어나고) 갑자기 공황이 온 사람을 돌봐야 했다. 환태평양 지진대의 불의 고리라도 된 마냥, 이 우연들이 규칙이 될까 봐 마음 앓이 하던 중 땡초장을 떠올렸다.


엄마가 만들어줬던 땡초장이 간장 육수를 기본으로 한 찰랑거리는 물양념장이라면, 내가 만든 땡초장은 국물이 거의 없는 고추다짐에 가깝다. 후루룩 끓인 멸치 육수에 소면을 넣고, 땡초장을 듬뿍 올린다. 양배추를 찜통에 찌고 깻잎과 켜켜이 얹어 잡곡밥과 땡초장을 넣어 한입 가득 넣는다.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 때도 땡초장을 넣어 본다. 올리브 오일과 마늘, 매콤 짭조름한 땡초장의 풍미가 꽤나 좋다.


얼얼한 땡초장으로 이열치열 내 마음속 불의 고리도 뜨겁게 삭이던 중, 뜻밖의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리포머에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두 다리를 내 머리 위로 막 밀어 올리고 있었는데, 다른 회원을 가르치는 필라테스 선생님이 황급히 올라와 울분을 토했다. 본인은 4년간 이 건물에서 수업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차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딱 하루 차를 렌트하여 반나절도 주차해두지 않았는데, 잠깐 그 사이에 차를 넣어둔 기계 주차장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 선생님의 차만 부서지고 말았단다. 선생님은 이건 드라마에 나와도 막장이라고 욕먹을 에피소드라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냐고 흥분하셨다.


요즘 재수가 옴 붙었다고 생각한 나는 선생님의 그 끝 모를 황당함에 깊이 공감하며 (이러면 안 되지만) 작은 위안을 얻고 말았다. 그래, 내가 겪은 일은 그래도 전후 사정이란 것과 통계적 수치로 따질 수 있는 원인과 결과는 있었지. 이런 개연성조차 없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영화 같은 일은 아니었지.

그 선생님과는 친분이 하나도 없는데, 순간 땡초장이라도 가져다 드려야 하나 싶었다.


  



볶은 애호박 고명과 땡초장을 올린 잔치국수

땡초장을 넣은 강된장

양배추 쌈과 땡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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