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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SU Sep 18. 2023

요리; 마음을 되돌리는 일

Ep 07: 오늘도 파스타

나만의 의식; 주말 첫끼는 무조건 파스타다.




어릴 때부터 종종 '헛똑똑이'란 소리를 들었다.

가진 능력 대비 대단히 똑똑해 보이는 둔갑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치기 어린 자존심에 똑똑해 보이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른들은 가끔 마음대로 내가 똑똑할 거라 상상하고 그리곤 실망했다.

시작은 Insomnia란 말도 안 되는 영어단어부터였다.

영어 학원의 어느 수업날, 선생님은 나지막이 Insomnia란 단어를 읊조렸고, 난 그저 엊그제 읽었던 두 권짜리 만화책 제목의 뜻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불면증이란 내 대답에 선생님은 마치 내가 나이 또래 대비 영어에 도가 튼 아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선생님은 소정의 아르바이트비를 주시며 영어원문 타이핑을 맡기시곤 했다. 하지만 뜻 모를 영어원문을 워드로 옮기는 일이라 스펠링이나 어순에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있는 앞에서 나에 대한 실망을 짙게 뱉으셨다.

 

이후에도 헛똑똑이 타이틀은 여러 분야에서 나를 따라다녔다.

딱 한번 망했던 중간고사 수학 점수도 지긋지긋하게 나를 쫓아다녔는데, 학교 수학 선생님은 반에서 공개적으로 내 수학점수를 외치며 나를 정성껏 울려주셨고, 친척들은 내가 수학기피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뒤에서 수군댔다.

대학에 와선 매주 수십 장씩 자동차 드로잉을 그려가야 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당시 선생님은 포드자동차의 미국계 디자이너였다. 전공으로 자동차를 희망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새벽마다 그려대는 바퀴 4개에 그럴싸하게 붙일 콘셉트가 고갈된 나는 어느 날 아무 자동차나 마구 그리고선 콘셉트가 없다고 했다. 당시,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이 선생님의 말을 통역해 주었는데, 친구가 통역해 준 선생님의 첫마디는 '넌 그래선 안돼'였다.


나는 전학 가는 날도 학교 숙제를 해가는 요령 없는 바보였고,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했다고 믿었다.

똑똑함을 뽐내기엔 가진 밑천이 뻔했고, 사람들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웃어 넘기기엔 예민하고 소탈하지 못했다. 왜 어른들은 멋대로 나에게 기대를 가졌을까.


어른이 되어도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단지 수학점수와 Insomnia가 아닐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건,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이라며 스스로를 조금 위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가 어디 쉬운 건가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면 마음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게 된다.

어릴 때 마음이 축 쳐질 때면 집에 와서 라면이라도 꼭 끓여 먹었다. 라면에 계란도 넣고 파도 넣고, 김치도 종종 썰어 넣으면서 나만의 요리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를 되돌리는 대단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있다. 꾸준히 노력한다고 하는 게 더 가깝겠지만.

주말 중 첫끼는 꼭 직접 만들어 먹으면서 한 주간 우울 했던 것, 기분 나빴던 말, 스스로 넘치게 몰입했던 생각들, 괜한 미래에 대한 걱정들을 조용히 휘저어 따라버린다.

그리고는 새로 발굴한 도예작가님들의 접시, 지인들이 사준 접시, 고이고이 보관하는 빈티지 접시에 정성스럽게 음식을 담는다. 한 입 한 입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오롯이 그 순간만 집중하려고 한다.

요즘 토마토는 아직 조금 시큼하구나, 표고버섯은 맛이 더 깊어졌구나, 이번 페퍼론치노는 엄청 맵구나, 다음엔 2개만 넣어야지 한다. 그렇게 요리를 하고, 먹고, 그릇을 씻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이 되돌아와있다.

어느새 요리는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지치고 힘든 일이 있는 친구들이 가끔 나에게 요리를 청한다.

요리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위로해주고 싶은 따뜻한 밥 한 끼다.

뭐 해줄까,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지만 사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밥 먹으며 같이 마음을 되돌려보자고.'





이번 주말의 파스타는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였다.

앤초비가 없을 때, 파스타에 참치액젓을 살짝 넣어주면 앤초비에 버금가는 풍미가 생긴다.

이태리 생파슬리도 좋지만, 타임도 너무 향이 좋은 허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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