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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영 Dec 10. 2023

밤이 익어가는 밤

Ep 08: 보늬밤

달착지근하고 농후한 늦가을의 밤




늦가을의 끝자락에 보늬밤을 만들었다.

단음식에 기피증이 있는 데다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그렇게 물 마시듯 여러 번 보면서도 만들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밤조림. 하지만 이 가을밤이 떠나기 전에 보늬밤을 만들고 싶어졌다.


회사처럼 세련되게 삭막한 관계를 유지하는 곳에서 감성의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람을 알게 되는 건 정말 우연하고도 평범한 순간에 일어난다.


글오라기*(동료의 필명)와 난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초여름부터 시작된 이 지리멸렬한 프로젝트는 10월과 11월 즈음에는 이 일로 인해 내뱉는 나의 한숨조차 지겹게 만들었다. 아마 사람이었다면 처음에는 이쯤 하자고 어르고 달래다 나중엔 제발 내 곁에서 좀 떨어지라고 울분도 토했다가 끝끝내는 목을 비틀었을 것만 같은 프로젝트였다. (징글징글하게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필 개인적으로도 다사다난한 시기였는데,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한주 중 뜬금없는 목요일에 연차를 쓰게 되었고, 우연히 옆 파트의 글오라기도 같은 날 연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어떤 연유로 연차를 쓰는지 가볍게 묻다가 난 글오라기가 책을 만들어 북페어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엔 일면식도 없는 사이었던 데다 우리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지극히 딱딱하고 논리적인 일이었기에, 특유의 감성을 가진 글오라기의 에세이 툰을 보고선 마음이 뭉근해졌다.


정성스럽게 어루만져 펴냈을 두 권의 책을 건네받고선, '이건 공산품으로 보답할 수는 없어.'라고 다짐했다.

그 길로 율피밤을 한 아름 주문하고, 밤이 도착한 그날부터 길고 긴 밤 불리기와 졸이기가 시작됐다.

부드러운 듯 거슬거슬한 율피를 벗겨내면 밤이 졸여지면서 다 부서지기 때문에, 율피인 채로 밤을 졸인다. 다만, 율피는 쓴맛이 있기 때문에 식용 베이킹 소다에 담가 하루 꼬박 짙은 밤 물을 우려낸다.

바깥이 어스름 해질 때쯤 냄비에 짙은 밤빛 물과 통통하게 불려진 율피밤을 넣고 한솥 끓여낸다. 밤들이 있는 힘껏 갈색물을 토해내면 깨끗한 물을 새로 받아 끓이는 과정을 두어 번 더 반복한다.

이제 율피가 손으로 살짝 밀어도 밀릴 만큼 부드러워졌다. 밤에도 심지라는 게 있어서, 먹을 때 불편하지 않으려면 밤이 으스러지지 않게 살살 심지를 제거해야 한다. 밤의 끝머리에서 시작되는 심지는 살짝 잡아당기면 마치 캐러멜의 포장지처럼 한가닥으로 벗겨지는데, 나름의 쾌감이 있다. 여기까지가 본격적으로 졸이기 전의 준비단계다.


이제 설탕을 소복하게 붓고, 약불에서 뭉근하게 졸여준다.

어련히 알아서 잘 졸여지겠지 하면서도, 제대로 되고 있나 걱정되는 마음에 냄비 근처로 가볼 때마다 밤들은 설탕물을 입어 농후하게 반짝였다. 밤이 깊어지는 만큼 알알의 작은 밤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윤기를 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씻고 삶고 졸이는 지난한 과정마저도 지루할새 없이, 바깥의 검은 밤도 냄비 안의 갈빛 밤들도 익어갔다.


얼마 전 글오라기로부터 보늬밤 소식을 다시 건네들었다.

늦가을에 받았던 밤조림은 서너 알 정도가 남아있었는데, 달착지근한 국물에 푹 담겨 더 농후한 맛의 밤이 되었다고. 그러고 우리는 또 우연히도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을 서로 추천하며, 남은 주말을 잘 보내자고 일상적이고 평온한 안부를 건넸다.




난 사실 보늬밤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내가 만든 보늬밤이 인생에 기억하는 첫 밤조림이 되어버렸다.

레시피보다 와인을 더 잔뜩 넣었다. 간장보단 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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