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 명란대첩을 치르는 중입니다.
차분하고 한결같은 외피, 반투명한 어류의 얇은 막. 이토록 얇은 다홍빛 살갗 속에 어쩜 이렇게 포슬하고 탱글한 알들을 가득 품고 있는지. 명란은 늘 경이롭다.
어촌 출신을 자부하며 어릴 때부터 다양한 젓갈들을 먹어왔지만, 명란은 특히 애정하는 젓갈이다.
갈치속젓, 멍게젓, 꼴뚜기젓, 낙지젓, 어릿 굴젓 등 모두 하나같이 위풍당당한 젓갈들이지만, 명란젓처럼 여러 요리에 어울리면서 균형감 있는 맛을 내는 젓갈은 찾기 힘들다.
껍질을 터트리지 않은 명란젓을 입안에 넣고 지긋이 베어 물어보면, 입안 가득 알알이 터지는 황홀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덩어리의 기쁨은 이내 작은 알갱이들로 흩어져 밥이든, 파스타든, 따뜻한 국물이든 같이 먹는 그 무엇과도 조화를 이루며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으레 젓갈이라고 하면 비릿하고 물컹한 맛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명란 특유의 활달하고 통통 튀는 식감으로 가히 젓갈계의 ‘명랑’이라 부르고 싶다.
유독 흐린 날과 비, 눈이 많이 오는 24년의 1월. 우리 집 식탁은 ‘명란대첩’을 치르고 있다.
[명란젓 무침]
무침이라고는 썼지만 엄마표 명란은 껍질을 제거하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살포시 껍질을 갈라 명란의 분홍빛 속을 살짝 보이게 한 후, 참기름을 끼얹고 다진 마늘을 도톰하게 올렸다. 이것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명란의 모습이었는데, 알싸한 마늘맛과 고소한 참기름, 명란 특유의 향과 질감은 어린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밥도둑이 되어버렸다. 후에 명란이 명태의 알이란 사실을 알기 전까지, 이 반투명한 알집이 해파리처럼 몽실몽실하게 바닷속을 떠다니는 상상을 하곤 했다.
마늘과 참기름을 알에 고루 비벼, 숟가락으로 도르르 긁어내 뜨거운 쌀밥에 얹는다. 다른 찬까지 곁들이지 않아도 충분하지만 가끔 구운 곱창김에 함께 싸 먹기도 한다.
타임세일을 할 어스름한 저녁, 소일거리 하듯 동네 마트에 나타나 할인 태그가 붙은 명란을 호시탐탐 노린다.
주말 이른 아침 하늘에 차분한 구름이 가득하면, 차곡차곡 모아둔 명란젓 하나를 꺼낸다. ‘오늘도 명랑하게!’
[단호박 명란 솥밥]
명란과 단호박? 레시피를 보면서도 조금 의아해했지만 샛노란 호박의 속살과 명란의 엷은 붉은빛 자태에 이미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단호박을 깨끗이 씻어 껍질 째 얇게 썰고, 육수를 자박하게 부은 쌀 위에 함께 얹어 밥을 짓는다. 뜸을 들일 때쯤 칼집을 낸 명란을 올리고, 종종 썬 쪽파를 이불 두르듯 소복하게 얹어준다.
명란이 익어 불투명한 분홍빛으로 보이면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살짝 두른다. 단맛을 즐기지 않기에 밥알과 명란젓 사이로 부드럽게 으깨진 단호박을 보면서도 내심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사람들은 어떻게 단호박과 명란의 조합을 알아낸 걸까. 밥물과 함께 푹 익은 단호박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호박 천연의 달큼함이 짭조름한 명란과 합쳐지면서 소소한 기쁨이 올라왔다.
양념장을 만들어두긴 했지만, 혀끝에 맴도는 미묘한 단맛을 놓칠세라 있는 그대로 먹기로 했다. 익히 친숙한 재료들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맛이 된다. 내가 먹어보고 좋았던 요리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어 지는데, 이렇게 새로운 기쁨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