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9: 온기 가득했던 열두 달 밥상
어김없이 올해도 매듭달이 왔다.
23년 나의 바람은 딱 한 가지였다. '소중한 사람들과 밥 한 끼를 더 먹는 한 해가 되는 것.'
내 소원은 이뤄졌을까. 늘 이맘때가 되면 지키지 못했던 다짐들, 알면서도 무심히 흘려보냈던 마음들이 아쉬움이 되어 돌아왔지만 올해는 아니다. 차고 넘치게 감사했고, 나를 돌봤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사계절 속의 나를 온전하게 해 주고, 지인들에게 온정을 나눠줄 수 있게 해 준 나의 열두 달 요리로 올 한 해를 기록해 본다.
#1 해오름달_JAN
새해 첫날, 1월 1일의 요리. 토마토와 구운 닭고기를 뭉근하게 끓여 따뜻하게 몸보신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 어릴 때 이미 굴맛을 알아버린 사람은 이맘때의 굴을 놓칠 수 없다
엄마의 묵은지와 들기름, 고소한 삼겹살. 올해 가장 많이 해먹은 파스타
혼자서 힐링할 때 일부러 해 먹는 동화 같은 추억의 솥밥
#2 시샘달_FEB
술은 못 마셔도 모든 해장음식을 사랑한다
외할머니의 사랑. 이제 엄마가 외할머니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여우가 유부를 좋아해서 키츠네 우동이 되었다는 설화.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의 기억
경상도는 얼큰이지. 서울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아직도 빨간 소고기 뭇국을 더 좋아한다
#3 물오름달_MAR
냉이향을 맡으면 그게 언제든 이미 봄이다
별도의 물 없이 토마토, 양파, 셀러리, 당근의 수분만으로 저온으로 1시간 동안 익힌다
올해 나와 내 지인들을 즐겁게 해 준 손에 꼽는 기쁨의 맛
#4 잎새달_APR
눈물 나게 매웠던 닭볶음탕만큼이나 잔인했던 4월
한약 먹는다는 핑계로 엄마한테서 받아온 소갈비찜. 그리고 들기름으로 신세계를 연 오징어뭇국
생레몬을 뿌려서 먹으면 더 이국적인 맛이 된다
#5 푸른 달_MAY
이사한 새 주방에서 처음 해 먹었던 요리
부드러운 리코타와 훌 토마토를 꾸덕하게 만들어 범벅으로 먹는 내 맘대로 파스타
만드는 내도록 너무 예뻤던, 보석같이 알알이 빛나던 자몽과 오렌지 과육
#6 누리달_JUN
너무나 애정하는 찌개. 애호박과 돼지고기와 새우젓은 정말이지
냉장고에 1년 내도록 바지락이 떨어지지 않는다. 툭하면 해 먹는 일상 파스타
#7 견우직녀달_JUL
열손가락 손톱밑이 싸해지도록 밤새 다진 청양고추로 만든 땡초장. 국수 양념장으로 찰떡이다
강된장에 땡초장 듬뿍 넣고 살짝 쪄낸 호박잎에 싸 먹기. 알싸한 초록맛과 짭조름한 된장의 맛이 환상
#8 타오름달_AUG
푹익은 김치에 삼겹살을 돌돌 말아 자박하게 끓여 먹는 밥도둑. 양념에 잘 벤 구운 두부도!
삼계탕보다 더 힘이 나는 나의 여름 보양식
#9 열매달_SEP
생각보다 너무 건강한 맛이었던 파피요트는 곧바로 김치찌개와 라면을 불렀다
육향이 가득한 차돌박이는 올리브유조차 필요 없다. 향긋한 미나리와 찰떡궁합!
#10 하늘연달_OCT
가을은 버섯향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버섯포타주의 따뜻한 첫맛과 육감적인 버섯의 맛
치킨스톡, 버터, 파에 볶은 완두콩 위에 몽글몽글 부라타 치즈 톡!
야근에 지친 몸과 마음이 해동되길 바라며, 꽁꽁 얼어있던 살치살을 꺼내 굽고 트러플 오일까지 쪼르르
#11 미름달_NOV
제철 맞은 달착지근한 홍가리비에 버터와 와인을 살짝 넣어 풍미 더하기
깊은 밤과 함께 농후하게 졸여진 나의 첫 밤조림
유독 흐린 날이 많았던 11월. 비 오고 추운 날 아침엔 수제비 생각이 솔솔
건보리새우와 새우젓으로 깊은 맛을 더하고 명란젓을 샤부샤부 먹듯 살짝 얹어만 주기!
#12 매듭달_DEC
독감에 이만한 죽이 없었다. 칼칼하고 아삭하고 따뜻하기까지 한
입안에 넣으면 알알이 톡톡 터지는 명랑한 명란의 맛!
가득 넣은 삼겹살을 미소된장에 살짝 볶아, 집된장과 섞어주면 더욱 감칠맛 나는 된장찌개가 된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새해의 1월도 너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