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했다. 다정했던 그녀와 달콤했던 순간들을 뒤로하고 이별을 한 지금, 지나 온 그 시간들이 내게 아무런 위안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옛 시간에 섞여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미 시간에 흩어진 나날들을 기어코 기억으로 끌어 당겨 오늘에 묻힌다. 이런다해서 지나 간 시간이, 떠나 간 그녀가 고스란히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다름이 참 많았다. 질투도 화도 많은 나와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안정적이고 다정했다. 같은 말을 할 때에도 투박한 나와는 달리 그녀의 말에는 조용함이 묻어 있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인 그녀를 만나 나도 점차 좋은 방향으로 변해간다는 걸 느낄때면 꼭 한번씩 내 본래의 성격이 나오곤 했다. 그건 오롯이 질투가 많고 화가 많은 나의 문제였다. 일순간 번져오는 화를 못이겨 그녀에게 풀어 낼 때면 그녀는 나와 다른 방향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화가 난 내 두 눈을, 날이 선 내 입술을 보며 그저 평소처럼 가만히 지켜 봐 주었다. 입장을 바꿔 내가 일방적인 화를 듣는 입장이였다면, 나는 그녀처럼 이렇게 올곧게 받아주지 못했을거란 생각은 화를 낸 후면 곧잘 들어왔다.
또 하루는 이런 날도 있었다. 말 끝마다 애정을 뿜어내는 그녀의 메세지를 보며 나는 그보다도 더한 마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나를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하는 것이다 - 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을 애써 눌러가며 표현하지 않았다. 그 때엔 내게 쉼없이 애정을 뿜어내는 그녀를 보며 내 사랑보다 네 사랑이 더 크구나 하는, 소위 말해 같잖고도 어줍잖은 우월감을 종종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 건, 그 때만큼 어리석은 때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였다. 나보다 나이는 어렸어도 언제나 성숙했던 그녀의 방식이 옳았다. 매 순간의 마음을, 번져가는 사랑을, 재지 않고, 숨기지 않고 오롯이 다 표현 하는 것. 그녀와 헤어지고 크게 반성을 했던 부분은 바로 이 것 이였다. 사랑 앞에서 다섯 살난 아이보다 못했던 나는 후회와 미련을 고스란히 안아야만 했다.
분명 하루 중 힘든 날도 있었을텐데 그녀는 항상 내 안부부터 물어왔다. 별 일 없었어? 그 물음에 나는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이르듯 하루를 조잘거리곤 했다. 그런다고 마음에 묻어 있던 일들이 지워지진 않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어쩌면 그녀 또한 나의 다정한 말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은연 중 나를 보며 자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가 먼저구나. 하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를 이제야 눈치채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사랑이 끝난 지금에서야.
나와는 달리 그녀는 일년 가까운 시간동안 사랑보다 아픔을 더 느꼈을 것 같았다. 멍청하게도 사랑이 끝난 지금에서야 이 모든게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작은 선물과 작은 행동에도 크게 웃어주던 그녀였는데. 미안함을 사소하게 느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사소한 내 행동들에 얼마나 마음을 아파했을까.
이제와서야 소용없는 후회들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아픔이 길다해서 상대를 미워할 수 없는 긴 이별이 내게도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