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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Mar 31. 2016

핀란드의 크리스마스 이브

크리스마스 햄과 크리스마스 포리지와 함께 하는 점심




크리스마스 이브 점심에 로바니에미에 있는 야니의 외갓집에 초대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끼리 모여 호텔 코스 요리를 방불케 하는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는 것은 핀란드의 전통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쉽게도 로바니에미 인근 숙소의 모든 객실이 만실 상태여서 오후 5시에 케미행 버스를 타야만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나를 위해 제이드가 점심은 야니의 외갓집에서 먹자고 초대해주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같이 밥을 먹자고 신나게 대답했는데 막상 그 날이 되니 명절날에 친구의 조부님을 처음 뵙고 점심을 같이 먹는 일을 너무 가볍게만 생각한 게 아닌지 긴장이 되었다. 특히 그동안 보고 들었던 북유럽의 가족 문화는 개인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필요 이상으로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이미지가 컸기에 식사 자리에서 웃을 수는 있는 걸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집에 들어서니 그런 걱정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긴 시간 동안 달려온 우리를 위해 점심을 준비해두신 식탁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맞춰 식탁보도 냅킨도 커튼도 촛불 장식도 예쁜 빨간색이었다. 창 밖으로는 하얀 풍경이 그림처럼 들어왔다. 이게 바로 북유럽의 크리스마스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예쁜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으려니 제이드가 밥부터 먹으라고 이야기했다.


"고운아 밥부터 담아."


크리스마스 포리지를 담고 있는 제이드
촉촉한 하얀 마시멜로 쌀 과자같다.


각자 개인용으로 준비된 접시를 들고 먼저 제이드가 냄비에서 크리스마스 포리지를 덜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호밀이나 곡류를 넣고 우유로 끓인 포리지를 먹는다면, 크리스마스에는 특별히 쌀로 만든 포리지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죽처럼 생겼지만 우유를 넣어 끓여서 그런지 좀 더 하얗고 몽글몽글하다. 크리스마스 포리지(우유죽)를 보니 어제 아침에 먹었던 Viili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우리를 위해 손수 만들어주신 식사인데 입에 안 맞아 남기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 들었다. 예전에 쌀에 우유를 넣어 끓이고 설탕과 계피 가루를 뿌려 먹는다고 하는 유럽의 음식 포리지에 대한 내용을 책에서 읽었을 때 그때는 이게 디저트지 무슨 식사냐고 생각했건만 내가 그 음식을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조심스럽게 한 국자를 떠서, 너무 적지 않게 그릇을 채운 뒤에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제이드는 해맑은 표정으로 포리지에 설탕과 계피를 뿌리고 있었다.


내가 잘 먹을 수 있을까?


야니가 설탕통을 가져가서 자신의 그릇에 설탕을 뿌리고 계피 가루도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우유를 부어 농도를 맞췄다. 나도 처음 비빔밥을 접하는 외국인처럼 야니와 제이드를 유심히 관찰한 다음에 그대로 따라 했다. 두 사람도 내가 실수할까 봐 이런저런 조언을 내게 해주면서, 자신들의 포리지를 섞어서 맛을 보고 있었다.



설탕과 계피 가루, 우유를 적당량을 더한 뒤에 이대로 섞어서 맛을 본 다음에 필요하면 좀 더 설탕이나 계피를 넣으면 된다고 한다. 적당히 섞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조심스럽게 한 입을 먹어보자 의외로 부담스럽지 않게 술술 넘어갔다. 우유의 비린맛은 계피가 잡아주고, 단맛이 사르르 감돌아 부드럽게 넘어갔다. 생소한 맛과 질감이었지만 그 전날 아침에 먹었던 까라야린삐리까처럼 계속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야니는 포리지를 먹으면서 군대에 있을 때, 소화도 잘되고 열량도 높고 든든해서 군대에서는 포리지를 매일 아침으로 먹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핀란드에서도 의무적으로 1년씩 군대를 다녀온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다. 로바니에미에서 근무한 야니는 그럼 강원도 근무를 한 것과 비슷한 걸까. 군인들이 매일 아침으로 이유식 같은 포리지를 떠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더 넣으라고 해서 최대한 용기내서 뿌린 계피 가루의 양...


크리스마스 포리지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단식기도 후에 먹는 첫 식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화가 잘되고 위에 부담이 안 되는 음식이어야 했고, 펑소에는 포리지를 호밀이나 일반적인 곡류로 만들었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쌀로 만든 하얀 포리지를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호밀이나 다른 곡류로 만든 포리지와 다르게 쌀로 만든 포리지는 부드럽고 고급스런 디저트같았다. 금방 한 그릇을 비우고 더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바로 치즈와 접시 한가득 쌓여있는 크리스마스 햄을 건네주셨다. 우리를 위해 크리스마스 햄을 미리 잘라두신 것 같았다.


할머니 아래 접시에 크리스마스 햄이 담겨있다.


크리스마스 햄을 돼지 뒷다리를 이용해 직접 만드는데, 기름기가 쏙 빠진 단단한 맛이 매력적이다. 미리 개별로 준비된 호밀빵에 버터를 바르고 크리스마스 햄을 올린 뒤에 치즈를 올려서 먹으면 된다. 겨자나 다른 소스를 필요하면 좀 더 발라서 먹어도 된다.



제이드가 옆에서 핀란드 사람들은 호밀빵을 많이들 먹는다고 알려주었다. 조금은 퍽퍽하고 기공이 균일한 호밀빵에 크리스마스 햄과 치즈를 얹어 먹으니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하이디를 돌봐주는 알름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랄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인 맛과는 거리가 먼 묵직하고 정직한 맛이었지만 호밀빵과 치즈와 겨자가 잘 어울렸다. 그러다 눈 앞에 놓인 딸기잼에 눈길이 갔다. 로바니에미에 오는 동안 제이드가 핀란드에서 인기 있는 경찰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거기에 자주 나오는 사건 중 하나가 할머니 실종 사건이라고 했다. 핀란드가 워낙 숲이 많고 베리류가 유명하다 보니 할머니들이 숲에 베리를 따러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과 방송국이 출동해 헬기로 할머니를 찾으면 할머니들은 오히려 이 곳은 나만 아는 장소인데 방송에 다 공개가 되지 않았냐며 역으로 화를 내신다고 한다. 품질이 좋은 베리가 열리는 자신의 비밀 장소가 공개되는 것을 실제로도 꺼린다고 하니 핀란드에서만 있을 수 있는 사건인 셈이다. 그렇게 베리가 많이 열리고 딸 장소가 많은 만큼 북유럽에는 잼 문화가 발달한 것 같다. 빵 또는 육류와 함께 잼을 곁들여 먹기도 하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집집마다 만드는 수제 된장, 고추장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눈 앞에 놓여있는 딸기잼도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당연하게 크리스마스 햄도 육류니까 딸기잼을 함께 먹으면 달콤하고 새콤해서 맛있겠다고 생각을 했고, 호밀빵에 버터를 바르고 크리스마스 햄을 올리고 겨자를 바른 다음에 치즈를 올리고 딸기잼을 올렸다. 정말 나름의 회심의 조합이었는데, 그걸 본 야니의 외할머니가 깜짝 놀라 웃음을 터트리시지 뭔가.



오, 쟤가 지금 겨자랑 딸기잼을 같이 먹는 거야?



정말 웃기신지 깔깔깔 웃음보가 터지셔서 야니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제이드도 놀랐다. 이미 한입 베어 물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놀랐다.


태어나서 겨자랑 딸기잼을 같이 먹는 얘는 처음 봐!



야니가 통역을 해준 덕분에 할머니가 왜 웃으셨는지 알고 나자 제이드가 내 손에 들린 빵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맛은 괜찮아?"


"응, 맛있는데. 할머니도 이렇게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아냐 괜찮아. 많이 먹어. 하하-"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할머니는 괜찮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 드실 거라나. 그래도 맛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주셨다. 딸기잼이 퍽퍽한 크리스마스 햄과 잘 어울렸다. 


"야니, 한국이라면 내가 지금 비빔밥에 젓갈 넣은 거랑 비슷한 걸까?"


"아마도? 핀란드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안 먹어."



크리스마스 햄을 잘라주시는 할머니. 동서고금 할머니는 언제나 챙겨주고 싶어하시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순록 고기나, 미트볼이나 크리스마스 햄이나 육류인 건 비슷한데 이렇게는 안 먹는 모양이다. 한바탕 웃고 난 할머니가 나를 편하게 대해주시기 시작했다. 엉뚱한 아이 같으니 긴장이 풀어지신 걸까. 내일은 혼자 여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크리스마스 햄을 챙겨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Yes! 언제 내가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햄을 먹을 수 있을까. 챙겨주신다니 고맙게 받겠다고 했다. 내일 내가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낼 예정이라 꼭 그때 먹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직접 만드신 솔방울 크리스마스 장식들, 어설픈 표정들이 귀엽다.
야니가 계속되는 음식에 힘겹게 웃고 있는 모습.


식사 내내 할머니는 야니와 나와 제이드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서 먹이고 싶으셔서 계속 부산스럽게 돌아다니셨다. 하나를 먹으면 또 하나가 나오고 끝이 없었다. 어른스러워 보였던 야니는 할머니의 그런 챙김에 당황하기도 하고 곤란해하기도 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손자 손녀들이 잘 먹는 게 좋다고 하시면서 밥솥 위에 올려둔 감자 한 알이라도 더 주시려고 하셨던 그 모습이 떠올라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디저트로 먹으라고 직접 구운 파운드케이크와 쿠키를 가득 채운 접시를 가져오시자마자 적게 먹는 편인 야니와 제이드는 동공이 흔들렸다. 알고 보니 내가 없어도 손자와 손자며느리에게 의례 이러시는 듯했다. 북유럽의 자녀 양육 방식이 매우 독립적인 편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연령도 낮기에 가족이라는 유대가 약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와보니 오히려 한국보다 더 끈끈한 가족의 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무뚝뚝해 보였던 야니의 외할아버지는 차 소리가 나면 야니가 도착했나 싶어서 매번 창 밖을 내다보신다고 한다.  



도착하자마자 야니와 제이드가 어딘가를 향해 인사를 하기에 보았더니 창가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가족사진을 찍어드리고 난 후에 내게 와서 초콜릿을 먹으라며 권하시게도 했다.(당연히 감사하게 먹었다.) 손자와 손자며느리를 아끼고 사랑하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손자며느리의 친구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두 분 덕분에 핀란드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더없이 따뜻했다. 떠나는 내 손에 할머니가 쥐어주신 파제르 초콜릿 선물 상자는 고이 한국까지 가져와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선물해드린 핫팩으로 겨울은 따뜻하게 나셨을까. 모쪼록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빌어본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한글 엽서와 순우리말 장바구니를 선물해드렸더니 매우 좋아해주셨다.






여행 중에 만나는 할머니께 사랑받는 방법



1. 주시는 건 잘 먹는다. 복스럽게 먹고 더 달라고 말하면 좋아해주신다.

2. 잘 웃고 간단한 단어라도 띄엄띄엄 말하려고 노력하면 할머니는 3살 배기를 보듯 귀 기울여 주실 것이다.

3. 준다고 하시는 건 사양하지 말자. 대신 나도 간단한 편지나 선물을 준비해가자.


레시피


크리스마스 포리지 레시피 : http://www.dlc.fi/~marianna/gourmet/xmas13.htm


준비물

300 ml 물
150 ml 쌀
700 ml 우유

밑면이 두꺼운 냄비


1. 먼저 냄비에 물을 끓입니다.

2. 준비한 쌀을 넣어 쌀이 물을 완전히 흡수할 때까지 불려줍니다.

3. 쌀이 다 불려졌으면 우유를 넣어 완벽하게 섞이도록 저어줍니다.

4.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어 40-60분간 저온에서 끓여줍니다. 중간에 밑에 타지 않도록 간간히 저어줍니다.

5. 벨벳같은 질감의 죽이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간의 설탕이나 버터, 소금을 넣어줍니다.


*크리스마스 포리지에는 아몬드 한알을 넣어 숨겨두기도 합니다. 아몬드를 덜어 가져간 사람은 행운을 가져가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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