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유언
박노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점차 가까워짐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병 때문도 아니고 사고 때문도 아니다, 모든 생물이 거쳐가야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환이었다. 박노인은 단지 그것을 겪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혼자서 있는 듯 없는 듯,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온 박노인은 자신이 죽음이란 것에 의연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박노인은 그러지 못했다. 의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포를 느끼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지난 세월의 지독한 회한만이 남아 그의 늙고 병든 정신을 괴롭혔다.
"할아버님, 세상에 지난주에 가져다 드린 반찬이 그대로 있네요?"
박노인은 감았던 눈을 지그시 뜨며 몸을 일으켰다. 독거노인인 그를 유일하게 찾아주는 사람, 담당 사회복지사였다. 젖은솜처럼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킨 박노인은 세월이 서린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이고, 송선생님 오셨습니까."
송은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된 뒤 처음으로 담당하게 된 박노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녀는 벌써 알게 된 지 1년이 다되어가는데도 자신에게 어김없이 존댓말로 인사를 건네는 박노인이 부담스러웠다. 제법 싹싹한 얼굴로 일어서있는 박노인을 편하게 앉힌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먼저 말을 건네는 것도 그녀 쪽이었다.
"할아버님, 요새 통 끼니도 제때 안 드시는 것 같고, 점점 야위시는 것 같아요. 고집 그만 부리 시고 저랑 같이 요양원으로 가요. 그럼 더 자주 볼 수 있어요."
박노인은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누웠던 이부자리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박노인의 말벗이 되기 위해 은주가 건네는 일상적인 대화들도 더 이상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라껍데기 속에 들어가 버린 듯 철썩철썩 파도소리만이 들려왔다. 미약 한숨을 내쉬며 박노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바다내음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스르르 파도에 휩쓸려가는 것일까.
"박가야.. 박가 이놈아"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박노인이 피 끓는 청춘일 때부터 벗이었던 윤노인의 목소리였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환한 빛과 함께 윤노인이 항상 입던 회색 점퍼를 걸친 채 박노인을 재촉했다. 박노인은 오랜 벗 윤노인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평소와 다르게 벌떡 일어섰다.
"정말.. 자넨가? 자네 맞아?"
"아, 이놈이 노망이 났나 쓸데없는 소리만 주절대고 앉아있어?"
"그.. 그럼 내가 죽었다는 겐가?"
윤노인은 이미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만약 박노인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윤노인이 눈에 보일 리 없었다. 놀란듯한 박노인의 질문에 윤노인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직은.. 아직은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 자네는 아직 죽을 준비도 안되지 않았나!"
"그.. 그게 무슨 소린가?"
"모르는 척하지 말게! 젊었을 적의 그 처자 기억 안 나는가? 허튼소리 말고 따라나오기나 하게!"
박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가족 하나 없는 독거노인인 그가 죽어가는 몸뚱이를 버리고 세상을 등질 수 없었던 한 가지 이유. 백발의 지혜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인생의 마지막 회한. 그녀였다.
"이보게, 그만 고개를 들게"
윤노인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박노인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박노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어리석은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청춘의 객기 한번 부려보지 못한 채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인생, 그 발단은 그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박노인의 허리가 곧고 온몸에 기운이 넘치던 그 시절. 여느 청춘들이 모두 그러하듯 박노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었다. 몇 달을 고민하다 자신의 마음을 전해보려 했던 그날, 그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는가. 박노인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조금 더운 날이었다. 덥 다기보다는 습했다. 그 당시의 박노인은 군입대를 위해 휴학을 결정했고, 몇 줄을 고민한 끝에 그는 종강 날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그가 다른 날과 달리 먼저 그녀에게 셔틀장까지 동행을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평소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걷던 그들 사이에 선배가 끼어들었고, 둘은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 순간 박노인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투명한 유리막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노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력감과 함께 멈춰 섰고, 멈춰 선 그에게 친구들이 다가와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너무도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한 박노인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뒤 계단 아래에 서있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에 아로새긴 뒤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 그것이 문제였고, 그것이 발단이었다.
그날 이후 박노인은 어차피 거절당할 자신과 부담을 가지게 될 그녀를 위해 혼자 포기했다는 거짓말로 자신을 감쌌다. 그리고 그것은 박노인의 후회와 회한의 세월로 오롯이 이어졌다. 평생 동안 자신을 학대하고 속이며 흘려보낸 허송세월이 너무도 아깝다는 것을. 자신을 위한 한걸음의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젊은 날의 자신이 너무도 창피했다는 것을. 그것이 그의 유일한 후회이자 미련이었다. 박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붉어졌다.
"박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나?"
다정한 윤노인의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 든 박노인의 얼굴에 자조적 미소가 번졌다.
"잘 알겠네.."
윤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박노인을 환한 빛무리 속으로 떠밀었다.
"그럼 준비 마치고 다시 오게나."
박노인이 힘없이 빛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박노인이 빛무리를 뚫고 나온 곳은 대학가였다. 이제 막 수업이 끝난 듯 삼삼오오 모여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여긴.."
박노인이 수백 수천번 떠올린 그날이었다. 미처 자신의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 용기 없는 위선자로 살아가게 됐던 그 시발점. 박노인은 그 학생 무리 속에서 쉽게 젊은 날의 자신과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죽을 준비조차 되지 않았다는 윤노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박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끝없이 되뇌며 지친 육신을 이끌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계단 밑에 서있는 그녀의 뒷모습. 그가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박노인은 계단을 내려가며 시큰한 무릎 통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계단 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보게 학생."
영영 다신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가녀린 등이 사라지며 박노인의 시야에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들어왔다.
"예?"
"누구.. 기다리는 건가?"
"예.. 친구요.. 근데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왜 우세요..?"
박노인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단지 잊고 지냈던 정인을 만나서였을까? 단지 그가 이루지 못했던 사랑의 꿈을 다시 마주해서였을까?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버린 박노인의 머릿속에 사랑이란 희미한 감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일평생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박노인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다. 돈을 모아도, 번듯한 집을 장만해도, 멋진 차를 사고 멋진 옷을 사도 채울 수 없었던 가슴속 공허. 평생 자신을 위한 용기 한번 내보지 못한 채 살아온 박노인의 가슴은 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공허를 메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아니.. 아니야.. 너무도 멀리 왔어.. 학생.. 이제 그만 나에게 상을 줘도 되겠지?"
"예..?"
"이제 정말.. 한 번쯤은 나를 위한 용기를 내도 되는 거겠지?"
"어.. 정말 편찮으신 거 같은데.. 저기요! 여기 누가 좀 도와주세요!"
쉴 새 없이 눈물을 쏟던 박노인은 쭈글쭈글한 손목으로 눈물을 훔치며 곧게 일어섰다. 박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커진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 왜 그러세요?"
꿈일까? 저승사자가 선물하는 마지막 행복? 아무래도 좋았다. 박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을 활짝 펴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의 생각이나 결정을 듣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난 단지 더 이상 나 자신을 학대하고 싶지 않아, 이해해줄 거라 믿어."
"예..?"
"마지막이니까"
"왜 이러세요?"
"정말.. 너를 좋아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박노인은 자신의 가슴속이 뜨거운 무언가로 차오른다는 것을 느꼈다. 일평생 메울 수 없었던 공허. 시린 바람이 매섭게 뚫고 지나가던 구멍은 더 이상 없었다. 박노인은 뜨겁게 차오르는 만족감과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금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너를.. 좋아해.."
낮게 읊조리는 박노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를 병원까지 데려온 은주였다.
"예? 할아버님? 할아버님?!"
은주가 걱정하며 말아 쥐고 있던 박노인의 손이 차갑게 식어갔다.
"삐-"
차가운 비프음과 함께 박노인은 파도 속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