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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Jun 08. 2017

현재 속도 0

누구에게나 멈춰 있는 이 순간이 필요하다.

빨리 달리는 것이 좋았다. 어릴 적,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노라면 부모님이 느린 차를 추월한다던가 빈 도로를 질주할 때 알 수 없는 통쾌함과 전율이 느껴졌다. 자동차 좌석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핸들 너머의 각도기 같은 계기판 바늘이 90도를 너머 180도를 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나의 즐거움이었다. 그가 가리킨 숫자를 속도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이전부터 100은 120보다 느림을, 그보단 120보다 140이 빠름을, 그래서 빨리 도착하려면 높은 숫자로 페달을 밟아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며 치타는 다른 동물보다 빠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세 살 아래의 동생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7살에 초등학생이 된 나는 같은 해를 살아온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진학했음을, 같은 시간 동안 학교를 다녔음에도 어려운 고등수학을 풀어내는 친구들은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외출할 때는 꾸물거리지 않고 빨리 준비를 마쳐야 하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속도는 어쩌면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해 두 다리로 땅을 딛기 시작하면서부터,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면서부터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속도는 단위 시간당 위치의 변화다. 같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변화량이 많으면 속도가 빠른 것, 덜하면 느린 것이 된다. 속도는 꼭 공간적인 위치 변화에만 쓰이진 않는다. 어제의 그것과 오늘의 그것이 가진 차이, 즉 무형의 변화에도 속도는 적용된다. 음식, 사회, 패션 트렌드가 바뀔 때에도, 날씨가 변할 때에도 우리는 속도라는 개념을 쓴다. 때론 빠르고, 때론 느리다.





한국은 빠르다. 사계절의 경계가 아무리 허물어졌어도 봄바람이 불면 황사 마스크를 준비하고, 홈쇼핑에는 공기청정기 방송이 이어진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에어컨 필터를 청소해두어야 하고, 가을 자락에는 가습기를 꺼내 두어야 하며 보일러를 점검하고 한파에 동파 대비를 해두어야 한다. 시즌 별로 옷도 침구도 바꾸어주어야 하니 봄에는 여름 대비, 여름에는 가을대비, 가을에 겨울 대비, 대비와 대비의 연속으로 늘 바쁘다. 그렇게 바지런하게 살아온 삶이 국민성이 되고, 이는 사회에도 투영된다. 할머니와 엄마와 내가 살아온 사회 환경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할머니의 유년시절에는 산에 여우가 살았고, 엄마는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 동네를 쓸고 들판의 잔디 씨를 모아 학교에 내야 하는 새마을운동의 일원이었다. 나는 한 집에 자동차 한 대씩은 몰기 시작하던 때에 국민학생 그리고 초등학생이었다. 할머니 시대의 산자락은 폭파돼 사라져 고속도로가 되고, 엄마 시대의 펄 밭은 도시가 되었다. 내 어릴 적 있던 건물들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지도 모른다.


여름나라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의 연속이다. 해는 어제처럼 뜨겁고 비는 오락가락하며 사방 천지의 나무는 어제도 오늘도 우거졌다. 과실은 풍부하고 논에는 늘 벼가 자란다. 굳이 약을 쳐서 해충을 물리칠 필요도, 줄을 세워 모내기를 할 이유도 없다. 풍부한 일조량과 습기에 자연이 알아서 키워낸다. 부산하게 움직여봐야 덥기만 할 뿐이다. 철저히 시간을 지켜 무언가에 대비하지 않아도 괜찮고,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 낮과 밤이 반복될 뿐이다. 글로벌한 요즘에야 그처럼 축복받은 환경을 갖지 못한 나라까지 먹여 살리느라 (대부분은 외부 세계에서 유입된) 시스템을 갖추어두었을 뿐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이어지면 시간의 변화에 무뎌진다. 지난주의 일인지, 지난달의 일인지 경계는 희미하다. 변화량이 적으니 속도도 느리다. 시간은 가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다.


 

적막했던 베트남 시골길의 산책
자연에서 자란 나무를 햇볕과 비, 바람에 숙성해 손으로 깎아 만든 티크소스볼
베틀짜기 도중 쉬고 있던 동네 아낙들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에 손으로 두드려 만든 주물이 연결된 티크트레이




현대 사회는 빠른 속도를 지향한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위해 노력한다. 하루 24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이상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더 높이 가고자 한다. 집을 넓히고 자산을 늘이는 전략을 세워 실행한다. 우리가 아기일 때 모든 과거가 ‘아까’ 모든 미래가 ‘내일’로 압축되던 삶은 다시 오지 않는다. 3개년 계획, 5개년 계획, 10년 후 목표 등 과거도, 미래도 무척 구체적이며 그렇게 세운 계획마저도 상황에 맞게 수정을 거듭하며 변한다. 결혼, 육아, 입시, 취업, 이직, 승진, 은퇴와 노후, 때로는 사후에까지 대비하고 또 대비한다. 걱정은 속도를 높이고, 속도는 확신을 주기보단 걱정을 부추긴다.




칵테일 같았던 보라카이의 바다
심심할 때 올라고 보고 싶었던 해변의 야자수
뱃사공 같은 수공예 컵리드
누군가가 손으로 정성스레 꼬아 만든 채반
해질녘, 보라카이 해변의 반가운 바람



그래선가. 속도에 지친 영혼들은 자연으로, 여름나라로 휴양을 떠난다. 계기판의 바늘이 잠시 왼쪽으로, 또다시 왼쪽으로 내려가 바닥에 닿기를 희망한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스케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곳의 햇살과 바람, 바다에 몸을 맡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에 빠지고, 그늘에 쉬고 물에서 논다. 낯선 사람과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시답잖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간, 속도 0의 순간을 맞이하고서야 우리는 편히 쉬고 마음을 보양한다. 우리 누구에게나 멈춰 있는 이 순간이 필요하다.






※ 삼청동 코지홈과 공동 기획하여 추구하는 가치를 담아 작지만 야문 매거진을 만들고 있습니다.

      코지홈 블로그 : blog.naver.com/cojeehome 




YUL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가치는 일상에서 실천하고 싶습니다.

블로그 : blog.naver.com/yulscountry
인스타그램 : @witht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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