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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Dec 11. 2019

김치 받아먹는 사람의 마음

내가 따뜻해진 만큼 내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며 살아야지

온라인으로 장을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과일이 맛이 없다거나 야채가 싱싱하지 않다거나 하는 품질의 문제야 업체를 원망할 수 있는데 사이즈를 잘못 살핀 때는 내 불찰이라 어디 탓할 사람도 없다. 아니, 잘못 살폈다기보단 상상의 오류라고나 할까. 사진으로 짐작한 것과 실물의 사이즈가 완전히 다른 때, 내 기준에선 소인국의 빅사이즈와 거인국의 스몰 사이즈를 받아볼 때가 이따금씩 생긴다.



얼마 전엔 배추가 문제였다. 적당히 샐러드도 해 먹고 노랗고 연한 속잎은 쌈 싸 먹을 요량으로 삼천 원짜리 배추를 하나 주문했는데 배송된 것은 내 몸통만 한 김장 배추였던 것. 냉장고에 들어가지도 않는 커다란 배추를 어찌할 줄을 몰라 일단 주방 한편에 놓아두었더니 남편이 보고서는 이건 심는 거냐 물을 정도였다. 식물 기르기를 좋아하는 아내인지라 혹시 자신이 모르는 관상용 배추가 있나 싶어 맛있겠다 해야 할지 예쁘다 해야 할지 정답을 찾는 눈치였다.



요즘이 김장철임을 잊은 탓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한동안 주방에만 가면 한쪽 구석에 놓인 배추를 보고서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났다. 이번에 알게 된 것도 있다. 기필코 다 먹어내겠다는 괜한 의지가 불타올라 매일 조금씩 바깥부터 안으로 한 잎 한 잎, 배추 도장깨기라도 하는 듯 꺾어 먹어 들어가는 동안 김장은 왜 겨울에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다닥다닥 모여서 추위를 이겨내는 남극의 펭귄처럼 배춧잎들은 서로 단단히 밀착해 한 포기를 밀도 있게 꽉 메우고 있는 데다 어느 한 잎 예외 없이 개운하고 달큼한 거다. 단 한 잎의 실망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기본 재료가 이토록 풍성하고 맛이 좋을 때니 이때 담은 김치는 어느 계절보다 맛깔 날 수밖에. 나는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 마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야 알게 됐다고, 선조의 지혜는 놀라운 거라고, 이때 담가 발효의 과학을 거친 겨울 김장 김치는 대단한 전통문화유산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 즈음이면 엄마는 김장을 했다. 가까운 이모네들과 모여 네 집이 한 해 동안 먹을 김치를 함께 담갔다. 어린 나는 며칠 전부터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도토리 밭에 나가는 다람쥐가 된 것처럼 왠지 조금 설레고 기대되는 거다. 딱히 하는 것도 없고 달리 아는 것도 없는데 마음만은 간질간질하더란 말이다. 내가 맡은 일이라곤 고작 누군가가 채 썬 것을 김칫소에 넣는 것, 누군가를 대신해 양념통을 열고 ‘그만!’ 하고 외칠 때까지 재료를 사알 살 부어 넣는 것, 테스트용으로 살짝 버무린 몇 잎을 먹어보고 피드백을 하는 것, 그 외에 가져오라는 걸 가져오고 가져다 놓으라는 걸 가져다 놓는 것과 괜히 해보고 싶을 때 몇 포기 버무려보는 체험 그뿐이지만 김장팀의 일원으로서 새로 올 한 해의 곳간을 채우는 데 기여하는 뿌듯함이 있었다. 



성인이 되고서는 그마저의 참여도 없이 엄마가 보내주는 김치만 넙죽넙죽 공으로 받아먹었다. 김장 배추의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언제 김장을 하는지 기본적인 지식도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저 ‘내일 일찍 택배 보낼 거야’ 하면 ‘아, 그날이구나’ 하는데 먹어온 가닥은 있어서 전날 꼭 돼지고기를 사다가 수육을 삶아두고 택배 아저씨를 기다리는 게 다다. 사실 요즘은 식구도 적고 김치 말고도 먹을게 천지인 데다 원하면 마트에서, 동네 반찬가게에서, 그리고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얼마든지 싱싱한 김치를 구할 수 있는데 어깨가 뻐근하고 손목이 시큰거릴 만큼 갖은 야채를 손질하고 채 썰고 버무리는 김장의 중노동은 얼마나 가성비 떨어지는 일인가. 그런데도 노동 없이 김장의 즐거움만 얌체같이 누리는 나는 언젠가 우리 집도 김장을 안 하는 날이 오면 철없이 섭섭한 마음에 ‘왜 안 해?’ 묻고 말 것만 같다. 김치를 사 오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고기를 삶을 리가 없을 테니까, 오직 엄마가 집에서 담가준 김치만이 내 마음을 간질일 테니까. 



며칠 전이 김장날이었다. 한참 전부터 엄마는 전화를 걸면 김장할 마늘을 까는 중이라서, 젓갈을 사러 나가느라고, 고춧가루 상태를 확인하느라고 등의 여러 가지 준비로 통화를 미루거나 짧게 마무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얼려둔 옥수수는 다 먹었는지, 일전에 가져간 은행은 얼마나 남았는지, 알밤은 더 저장할 공간이 있는지, 생굴은 얼마나 보내면 좋을지 물으며 보내는 김에 보내겠다는 김치 외의 택배 상자도 구성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언젠가 내가 ‘멍게 먹고 싶다’ 지나가는 소리 한 걸 기억하곤 제일 바쁜 김장 전날 짬을 내 시장까지 봐다 놨단다.  



전화를 끊고 창가에 가만히 앉으니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먹고 싶다는 건 잊는 법이 없는 엄마는 냉장고 옆 포스트잇에 예쁜 글씨로 체크리스트를 적어두고 그것들을 가상의 아이스박스에 드래그 앤 드롭을 반복하며 빈 공간이 얼마나 있나 예상해봤을 거다. 그래서 공간이 ‘혹시’ 남으면 할머니네서 가져온 브로콜리도 하나 넣고 엊그제 사다둔 사과도 하나 넣자 생각하며 더 줄 수 있는 것들을 대기명단에 올렸을 거다. 당일 들어가는 택배는 아침 9시 전에 접수를 마쳐야 하니 10분 전까진 우체국에 도착하려고 집에서 8시 반에 출발, 그러려면 언제 일어나서 김치를 버무리기 시작해야 하는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시뮬레이션한 끝에 다음날 아침 알람을 맞추었을 거다. 그런데도 혹시 못 일어날까 무의식 중에 걱정한 나머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을 테고 아직은 동이 트지 않아 어두운 새벽, 고무장갑을 끼고 다라이 앞에 앉아 물기 빠진 배추 사이사이 양념을 채워 넣었을 거다. 틈틈이 시간을 확인하며 8시가 되면 체크리스트의 음식들을 꺼내 박스 포장을 하고, 김치도 김장 비닐에 한 번 또 한 번 감싸 밀봉했을 거다. 분명 시간이 여유로울 테지만 ‘얼른’ 나갈 채비 하라고 아빠를 독촉했을 거다. 그래서일까. 집에서 온 택배 상자를 열면 아무리 힘든 날에도 알 수 없는 미소가 온 얼굴에 환히 퍼진다. 모질고 추운 날에도 가슴속 무언가가 따스하게 빛난다. 






분리수거 날, 아이스박스를 버리러 나갔다. 요즘 부쩍 아파트 쓰레기장에 김장 비닐과 아이스박스가 많이 나온다. 저 집도 나처럼 듬뿍 사랑받았구나, 저 집의 엄마도 몇 날 며칠 장을 보고 손 아프게 재료를 준비하고 아침 일찍 버무린 김치가 혹시나 익지 않게 야무지게 여며 멀리 사는 자식 먹으라 정성스레 보내셨구나 생각하니 돌아선 사람들의 마른 등짝마저 포근해 보였다. 아, 김치 받아먹는 사람의 마음이 추울 수가 있을까. 어쩌면 마음의 온도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맛있는 걸 보고서 나를 떠올리고 맛있는 걸 만들어 나를 먹이려는 사람이 있으니 내 마음이 따뜻한 게 아니겠나. 그러니 마음 보일러 스위치는 내 손이 아닌 타인의 손에 쥐어진 거다.


내가 따뜻해진 만큼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며 살아야지.


너그럽게 길게 드리운 겨울 오후의 해를 쪼이며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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