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baD Jun 23. 2020

취준생 일기 - 몇 번째인지 까먹음

20160919

카페에 앉아 자소서를 쓰는데 옆에 개미가 먹이를 물고 지나간다.

아까 공원에서 내 가방에 올라타 엉겁결에 나와 카페까지 동행한 그 녀석인 것 같다.
카페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는데 눈에 보이길래
"이거 여기에 이렇게 버려(?)도 되나?" 생각하며 툭 털어낸 기억이 난다.  

자기만 한 먹이를 물고 헤맨다. 명색이 카페니까 먹을 걸 찾기는 어렵지 않았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자기 집을 찾고 있다.
신은 왜 개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길가에 말라죽은 지렁이들을 볼 수 있다.
땅속에 사니까 나처럼 눈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비 오는 날에 땅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비가 안 오는 날에도 나가고 싶어 하는 놈들 꼭 있고 열에 아홉은 길을 잃고 작렬하는 태양 아래 장렬히 객사한다.
신은 왜 지렁이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이따 집에 갈 때 데려다주려고 그 개미를 마시던 커피 컵 뚜껑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무서운지 빙글빙글 돌다가 급기야는 먹이도 내려놓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땅을 파려는 것 같다.
이보게 그건 페인트칠을 한 나무 합판이네. 자네 합판이 무언지 알고 있는가?


회사들이 자꾸 지원 동기를 물어보니까 내가 이렇게 미쳐간다. 6시 마감인데 지원 동기? 부쪼께서는 회사를 계속 다니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정부가 간과하고 있는데,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은 청년실업자였다. 과거에 세 번 낙방하고 크게 상심한 홍수전은 14년간 청나라 황실을 벌벌 떨게 할, 19세기 최대의 군사분쟁으로 꼽히는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다.
저 개미에겐 내가 신이 아닐까?
홍수전은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난 첫째인데..?


자신의 시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낙심했는지 개미가 미동도 않는다. 죽은 줄 알고 컵을 툭 쳤더니 귀찮아한다.
오늘따라 투썸의 선곡이 탁월하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쏟아지는 오후 두 시의 햇볕을 받으며 개미와 놀고 있다.


신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질수록 나는 다른 일이 하고 싶다.
계속 문자 온다 오늘 서류 마감이라고
예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집에 가려고 컵 뚜껑을 집어 들자 그 개미는 용천지랄을 하더니 의자와 벽 틈새로 사라졌다. 운명인가 보다.






이번 글 또한 10개 머리수를 맞춰 브런치 북을 만들고자, 독자 통계 페이지를 사용해 보고자 브런치로 소환된 과거 글이다.

게다가 일장춘몽 귀국 후 취준생의 나른함이 담긴 글이니 끼워 넣기 적절해 보인다.

이 글이 내 1차 백수 시기, <인투디 서른>이 2차 백수 시기, 지금이 3차다.

취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앞으로는 진짜 착실히 다녀야지! (내가 집을 사겠다는 야망이 있었다면 이게 좀 더 쉬웠을 텐데)


이전 08화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