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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Nov 15. 2022

다시 돌아온 치앙마이

D+27, 치앙마이 > 치앙라이 > [치앙마이] > 방콕 > 시아르가오

대학 시절 여행할 때는 시간으로 돈을 샀다. 

24시간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게 5만 원이고, 비행기로 4시간 만에 가는 게 15만 원이라면, 나의 20시간은 10만 원보다 비싼가? 안 비싼가?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는 계산이지만 당시에는 망설임 없이 버스표를 끊었다.

이제 돈을 조금 버는 삼십 대가 되니, 체력과 컨디션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우선순위 꼭대기로 기어올랐다. 특히나 일을 하려다 보니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쓰게 된다. 책상직인 내가 가진 재료라고는 나의 정신력과 체력뿐이니, 내 요리를 먹게 될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재료의 신선도를 관리해야 한다.

그러려면 숙소비를 더 내고 더 좋은 곳에 묵어야 한다.


재택 근무, 원격 근무라는 걸 

회사들은 아직까지 '직원 복지' 혹은 '우리가 이렇게 앞서 나가는 회사다'를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 같다. 원격 근무의 매력은 지금까지 내가 익숙했던 일하는 방식(예를 들면 사무실 출근)과 제약 조건, 문제의식이 정 반대라는 점이다.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나는 이미 원격 근무 예찬론자다. 어떻게 인재 채용의 주요 조건이 '우리 오피스 근처에 살고 있거나 장거리 통근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겠나! 

아,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인재가 드넓은 오대양 칠대륙 중에 하필 우리 회사 주변에 살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나? 회사들이 강남이나 샌프란시스코의 살인적인 임대료를 감당하는 이유가 여기 있겠지만, 혁신은 대도시를 떠나고 있다는 풍문이 돈 지도 오래다(WSJ 2020). 네트워킹은 트위터에서 한다.


지금 앉아있는 카페는 숲 속에 있다. OZARK by Food4Thought


원격 근무가 보편화되면 '직원 복지'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한국에서 회사가 직원에게 주는 급여 중에 '식대'라고 표시해서 주는 부분은 월 최대 10만 원까지 비과세 소득이다. 2023년부터 이 한도가 20만 원으로 높아진다고 한다.(기사) 그런데 왜 회사는 직원에게 밥 먹으라고 돈을 따로 챙겨주는 걸까? 월급을 많이 주면 직원들이 알아서 맛있는 거 사 먹지 않을까? 정부는 또 왜 나서서 딱 그만큼만 세금을 안 떼겠다는 걸까? 

'원격: 오피스 필요 없음'라는 책을 쓴 37Signals 라는 회사의 직원 복지는 신기한 게 많다. 몇 개만 뽑아보자면 연간 유급 휴가 18일에 '로컬 휴일(local holiday)' 11일 추가, 코워킹 비용 월 $200 지원, 자택 사무실(home office) 세팅 비용 입사 시 $2,000 및 3년마다 $1,000 지원 +공기 질 모니터링 기기 지원(Awair 한국 회사 아닌가! 한국 회사라는 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반구의 여름(5-8월)에는 주 4일 근무(Paid Time Off) 등이 있다.

자 이제 회사에 원격 근무랑 이런 복지 요구해보실 분?


이번 주에 트위터 스페이스와 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일이 있었는데,

내 목소리만 안 들린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사실 나는 마이크 딸린 유선 이어폰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억울해서 녹화본을 다시 들어봤다. 진짜로 내 목소리만 안 들렸다. 하필 내 차례 때 지나가던 개 짖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해당 트스가 1,200번이나 재생됐다길래 청취자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남아의 아마존이라는 라자다에서 '노캔 마이크'를 검색해봤다. 무려 AI로 노이즈를 지워준다는 어뎁터가 있었다. 하지만 배송이 2-8일 걸린다고 나와있었고, 그때쯤에는 필리핀의 작은 섬에 있을 예정이며, 그 섬은 배송 불가 지역이기 때문에 그냥 앞으로도 계속 미안해야겠다.


노마딩을 '코워킹 인프라가 있는 도시' 만 가는 것으로 제한해야 할까?

일할 때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면 내가 직접 나를 제약해야 한다. 하지만 나의 루틴은 아직 너무 연약하고 쉽게 깨진다. 나의 절제력과 집중력, 혹은 역할/책임을 가시화(accountability)하고 경계를 설정(boundary setting)하는 능력은 아직 신생아 수준이다. 실제로 신생아만큼이나 그런 걸 해본 경험이 없다. 걸음마를 뗄 때까지 코워킹처럼 최적화된 공간이 필요할까?


치앙마이 쿨가이 헤어스타일 짱이다!

가끔 사람들이 나를 남자인 줄 안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맘에 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내게 OPPA 를 외치던 라오스 아주머니는 '나 동생 언니인데?' 하니까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K드라마 만세)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내 성별을 정확히 알아맞히는 게 언제부터 그렇게 중요했던가? 여행할 땐 오히려 좋아 

머리가 훅 짧아지니 일단 샤워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딱히 감을 머리카락도 없다. 컨디셔너는 당연히 안 쓴다. 말리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짧아졌다. 한국에서는 SBF같은 곱슬곱슬 흑발의 어린왕자 머리였는데, 그땐 1-2분 정도 드라이기로 말려줘야 했다. 치앙마이 쿨가이는 수건으로 툭툭 털어주면 끝난다. 

무에타이 할 때도 시야를 가리거나 얼굴에 달라붙거나 하며 날 귀찮게 하는 치렁치렁 죽은 세포들이 없으니 세상 편하다. 다음 주부턴 바닷가에 살게 되는데, 서핑할 땐 또 얼마나 편할까!


치앙마이는 지금 호텔방, 오토바이, 고속버스, 무에타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관광객도 참 많지만 터줏대감인 엑스팟(자기 나라를 떠나 사는 사람들)이나 노마드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떠나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기 나라를 욕하며 태국을 찬양하는 게 재밌다(물론 나도 포함이다). 한국 공무원들의 롤모델 싱가포르, 만인의 로망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내가 1순위로 골랐을 캐나다, 유럽의 마지막 자존심 독일 등등 그 좋다는 나라 사람들이 치앙마이에 모여있다. 앞다퉈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다시 머리 기르기 싫어서라도 귀국이 어렵겠다.


로컬 숙소에 보름쯤 묵었더니 로컬병이 싹 나았다

나는 여행할 때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해보는 걸 좋아한다. 가끔은 정도가 지나쳐 이건 로컬병이 아닌가 싶다. 치앙마이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이는 니만 지구를 최대한 멀리하고 있다. 숙소도 백인들은 얼씬도 하지 않을 외딴&허름한 곳으로 골랐다. 1층 로비에 계신 분들과 영어로 전혀 소통이 안되길래 제대로 찾았구나 싶었다.

지내기는 역시나 불편하다. 매트리스에는 스프링이 없는 게 분명하며, 방충망이 없어 창문을 열어 둘 수 없다. 무엇보다 전등에서 고장 난 냉장고 소리가 난다. 곧 폭발할 것 처럼 시끄러워서 방 안에선 주로 불을 끄거나 귀마개를 낀다. '세탁기' 구글 번역기 돌려 로비 아주머니께 보여드렸더니 손빨래 하는 시늉을 하셨다. 아, 이게 로컬이구나! 무릎을 쳤다. 오토바이에 빨랫감을 이고지고 10분쯤 운전해서 코인빨래방에 도착했더니 로컬병이 씻은듯이 나았다. 나는 템퍼 매트리스와 이중창과 높낮이 조절 책상과 허먼 밀러 의자와 워시 타워를 원한다.


안녕이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노마드 한 달 차, 안녕은 매번 어렵다. 한 노마드는 '이야기의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덜 소중해지는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제야 나는 왜 이곳 노마드들이 내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줬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한 때 내 좌우명이었던 일기일회(一期一會)를 여행길에서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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