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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Nov 27. 2022

방콕에 들렀다가 시아르가오 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노마딩 40일차, 치앙마이 > 방콕 > [시아르가오] 한 달 살기

노마딩을 꿈꿨던 이유 중 하나는

서핑이었다. 서핑 예찬은 양양 살던 시절에 충분히 한 것 같으니 건너뛰

면 아쉬우니까, 창업주가 직접 쓴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이라는 책 얘기를 잠깐 해보자. '경영 도서' 매대에 이 책이 깔려있는 걸 보고 '틀린 그림 찾기'를 한 것 같았다. 파도가 칠 때 직원들이 서핑을 할 수 있게 한다(원제: Let My People Go Surfing)는 건 무슨 뜻인가? 내일 파도가 좋을지는 내일 돼봐야 안다. 구성원이 당일 휴가를 내도 조직이 굴러가는 데 문제가 없거나 문제를 감수한다는 뜻이다. 유별난 비전과 우선순위와 철학과 사내 정책(창업주 일가는 그 수십조짜리 기업 지분 전체를 기후 변화 해결을 위한 신탁과 npo에 넘겼다. 지구가 자기들 유일한 주주라며!) 등등을 가진 파타고니아에 대한 책을 한국 경영자들이 읽는다니?!

아무튼 맘껏 서핑하려고 노마드가 되었고, 그러려면 '파도 공장'이라 불리는 전 세계 몇 없는 서핑 포인트에 살아야 하며, 그래서 지난주부터 필리핀 시아르가오에 살기 시작했다.


치앙마이에서 시아르가오로 가기 위해

방콕과 마닐라를 거쳐갔다. 방콕에는 사흘 정도 머물렀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대도시들은 주변 다른 도시들보다 자기네들끼리 비슷하다더니, 방콕은 치앙마이만큼이나 서울을 닮았다. 사람 많고 길 막히고 공기 안 좋고 빌딩 높고 카오산 거리는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와식 생활을 했다던 로마 귀족과 비슷한 자세로 야외 의자마다 백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튼 방콕에 별 매력을 못 느낀 덕분에 숙소-카페(일터)-식당을 오가며 성실한 회사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열대의 섬에서 일도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건 환상이다

일단 인터넷이 잘 안 된다. 일단 전기 공급부터가 불안정하다. (정전으로 일순간에 섬이 깜깜해져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나도 쿨한 외지인이 되기 위해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더워서 사람들이 옷도 잘 안 입고 다닌다. 저어기 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다. 한인 서핑샵 사장님은 '성실한 현지 직원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셨는데, 게으름은 겨울을 준비할 필요 없는 사람들의 특권이 아닐까. (노숙하기에도 열대 기후가 좋아서, 코로나 시국 파타야에는 구걸하는 백인 거지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시아르가오 생활에 대한 '기대 관리(expectation management)'는 빠르게 이뤄졌다

공항에 내리니 온통 야자나무뿐, 지평선에 달리 눈에 걸리는 게 없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흔들리며 바라본 창밖 풍경은 얼기설기 목구조와 합판과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집들과, 말로만 듣던 '마중물' 비유의 실물, 우물 펌프였다. 그래서 숙소 바닥이 온통 머끌머끌 모래밭이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기후 때문인지 벽이나 문이 잘 없어 실내외 공간의 경계가 희미하다. 길가에 뛰놀던 개들이 밤에는 호스텔 소파에서 잔다. 개도 고양이도 묶지도 가두지도 않고 같이 산다.


파도는 그림 같다

밤하늘에 별자리가 걸려있는 새벽 4시 반에 길을 나서서 5시에 배를 타고, 5:30 해 뜰 때 즘 그날의 파도 좋은 곳에 도착한다.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파도에서 멀찍이 닻을 내리면, 한 무리의 새끼 거북이가 되어 풍덩풍덩 바다로 뛰어들어 자기 보드에 올라타 엉금엉금 파도를 향해 헤엄친다. 

선명한 별자리, 보라색을 머금은 어슴푸레한 수평선, 아직 완전히 뜨지 않은 해가 바다의 겉면에 반사시키는 빛과 그림자, 윤슬, 수평선을 탈출한 해가 비추는 에메랄드빛 바다, 먼바다에서부터 일렁일렁 다가오다 투명한 산이 되어 나를 등에 업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장관, 자연의 걸작(masterpiece)이다.

첫날 파도 타다 눈앞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여기 혹시 메타버스인가? 나 지금 호접지몽? 파도가 좀 CG 같은데'라고 딴생각하다 중심을 잃고 그대로 물속에 메다 꽂힌 적이 있다. 기계문명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한계

이렇게 침 튀기며 예찬하지만, 실상은 목숨 부지하기 바쁘다. 수영장 인간은 망망대해에서 한 마리 물벼룩이 되어 자기보다 커다란 파도를 무서워한다. 현지 서퍼쌤이 먹기 좋게 밥상을 다 차려주는 걸 '황제 서핑'이라고 하는데, 옥체를 보전하느라 너무 바빠서 나는 내가 황제인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흥이 많다

나의 서퍼쌤은 바다에 둥둥 떠다니며 '컴온~ 웨이브~~' 라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거나 도로를 점거한 오리떼들에게 '굿모닝!' 이라고 인사를 건넨다. 불혹을 넘겼다는 그는 소년의 눈을 가졌다. '유 룩 베리 영' 했더니 목숨줄을 위탁한 강습생의 흔한 아첨으로 들으셨는지 '유 라이 투 미' 라며 또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보여줬다.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상하수도나 비상용 전력 발전기도 없지만 노래방 기계는 가정집에도 있다. 가로등도 없어서 밤이면 어둠이 낮게 깔리는데, 불이 켜져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포켓볼 다이가 모여있는 내기 당구장이랑 시멘 바닥의 농구 코트다. 여기서 합법이라는 닭싸움 경기는 그 열기가 UFC 경기장을 방불케 한단다. 엊그제 웬 아저씨가 애지중지 닭을 옆구리에 끼고 지나가서 어안이 벙벙했는데 UFC 선수였나 보다.


시아르가오는 이쯤에 있습니다. 출처 구글맵


이곳저곳 떠돌며 살면 좋은 게

내 주변 환경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지난 한 달은 태국 북쪽의 산이었고, 앞으로 한 달은 바닷가 섬마을이다. 이후에는 (한국에 잠시 들러 반바지를 떨구고 털옷을 챙긴 다음) 미국 북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지금의 날씨 및 생활과 극적인 대조를 물질문명 만세!! 이루며 두어 달 살아볼 예정이다. 

열대의 섬 생활에서 몸으로 배우는 것들도 있다. 인프라가 없으면 단위 생산 비용이 높다. 대형 기업이 없고 규모의 경제도 없다. 필리핀이 태국보다 물가가 싸겠거니 기대하고 왔는데 전혀 아니다. 섬에는 공산품이 잘 없다. 가장 가까운 큰 섬이 배 타고 두 시간 반 거리, 웬만한 물자는 마닐라나 세부를 거쳐야 한다. 우유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젖소를 직접 키워야 할 것 같다. 혹은 가루우유를 마시거나. 

오늘은 섬이 하루 종일 정전이었고, 저녁 6시쯤 복구됐다. 매일 새로운 레스토랑이 오픈할 정도로 코로나 이후 섬의 관광산업이 빠르게 크고 있기 때문에 전력망에 부담이 간다고 한다. 지하수를 전기 모터로 끌어올리기 때문에 정전되면 물도 안 나온다. 화장실 가고 싶으면 자체 발전기를 돌리는 서양인들의 리조트에 가서 비싼 밥을 먹는다. 누리고만 살아봤던 생활 기반 시설들에 대해 배운다. 이것이 모아나의 삶인가!


언어를 배우는데는 '다언어' 환경이 중요한 것 같다

한국은 단일민족은 아니지만 단일 언어 국가다. '국어' 아니면 '외국어'다. 한국어만 할 줄 알아도 사는 데 지장 없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그렇게 외국어를 못하나 그래서 한국에서 영어는 '우리 집 영어 교육에 이 정도 투자했어'라는 사회적 신호가 되고, 누가 영어를 더 잘하고 못하고 발음이 느끼하고 담백하고 문법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것 같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던 인도인 친구는 자기 엄마와 아빠의 제1 언어가 다르다고 했다. 인도에는 200여 개 언어가 있는데, (공식 언어는 영어와 힌디어) 그래서 티비 뉴스 채널이 20개면, 그중 10개 채널은 영어, 5개 채널은 힌디, 5개는 그 지역의 고유 언어로 방송된다고 한다. 인도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게 갑자기 이해가 됐다. 노마드들도 비슷하다. 다들 모국어가 다른데, 의사소통은 해야겠고, 그나마 영어가 만만한데, 계속 쓰다 보니 영어가 좀 편해진다!

필리핀 사람들도 영어를 짱 잘한다. 천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필리핀에는 백여 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매운맛 근현대사로 인해 스페인 식민지기에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였다가, 미국이 들어와서 스페인어를 금지시키고 영어가 공용어가 됐고, 토착언어인 따깔룽(스페인어와 좀 비슷하다)어도 공용어다.


석유 문명과 전기 문명의 차이

나는 후자라서 정전되면 눈앞이 깜깜한데 현지인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원격 근무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인터넷 속도와 안정성은 날씨에 달렸다. 섬으로 들어오는 유선 케이블이 없고, 이 섬 전체가 거대한 무선 공유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아르가오는 오후 5시면 어둑어둑해지고 5시 반에 해가 진다. 그리고 정확히 그 때부터 인터넷이 안된다. 해 지면 다들 광란의 파티 하릴없이 인터넷에 접속하나보다. (사실 낮에도 서핑과 멍때리기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 그래서인지 여기 아이들은 다들 서핑 초고수고 바다에서 날아다닌다) 

해 뜨는 시간도 5시 반이다. 그래서 서핑 안 하는 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기 시작했다. 그럼 인터넷 망을 독점할 수 있다!

시아르가오, 아침형 인간 확장팩! (30일 체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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