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바라보는 사소한 재해석
일상은 수많은 단편적 길의 합이다. 누군가는 그 길을 '사건'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일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상'이라는 단어는 삶의 지루한 반복을 내포하기도 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상이었다, 라는 의미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일상은 조금만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이 많다. 나는 그런 비일상적인, 사소한 사건과 단상을 적으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을 조금이라도 풍족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
스마트폰 통화 녹음 목록을 보면 우연히 녹음된 통화가 많다.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전화를 받으면서 볼로 통화 녹음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볼 터치 실수만큼 의도치 않게 통화 녹음 파일이 쌓여간다. 통화의 상대방은 직장 상사, 부모님, 친구, 거래처 등 다양하다.
녹음된 통화를 가만히 재생해 듣는 일은,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다. 나 자신과 그리고 나와 통화한 사람, 그 상황, 통화 내용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 같은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직장 상사와의 통화 내용을 듣는 중 받은 느낌은,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자신감 없게 들리지? 였다. 좀 어버버 거리는 거 같기도 했고, 무언가 알아보라는 상사의 지시에 잘 모르면서 알아들은 척하는 거 같기도 했다. 실제로 그 당시 무얼 해야 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의 억양이나 상사의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의 완성도를 반추하면서 상사의 기분-무언가 불만족스러운-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역지사지의 정신이랄까. 그 뒤로 나는 상사와의 대화에 최대한 목소리 힘을 싣고자 했고 상사가 궁금해할 만한 정보나 기타 상황들을 미리 확인하려 애썼다. 상사가 갑자기 부르는 거나 전화 오는 것은 언제나 애로사항이었지만.
상사와의 통화와는 반대로, 나는 부모님과의 통화에서는 완전히 갑으로 둔갑해버렸다. 부모님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기 일쑤였고, 내 마음이 내킬 때 대화를 단절하고 끊고 있었다.
짧은 대화 끝에..
"알겠어요. 아버지 얼른 푹 주무세요"라든지, "응,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라고 내가 말하면 부모님과 나의 통화는 그대로 끝나버렸다. 상대방의 말문을 막으면서 일방적으로 대화를 종결하는 것이다. 통화가 길다면 그렇게 일단락하는 것도 수긍할 수 있지만, 부모님과의 통화 시간은 겨우 1분 내외였다. 그리고 대화 자체도 듣고 있노라면 그건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식으로 대답하거나 했다면 나는 분명 따져 물었을 것이다.
"제대로 안 하나요?"
하지만 부모님은 내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참고 계시는 것이다. 삶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제는 아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까지. 그리고 나는 그게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려서 언제까지고 그들을 참게 만드는 것이었다. 과거의 나에 대해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서글퍼졌다.
나는 가끔 두려운 상상을 하게 된다. 혹시나 부모님이 잘못되거나 하지 않을까. 그런 불길한 상상은 불현듯 떠오른다. 비극적인 뉴스, 주변 누군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거나 특히 부모님이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불길한 상상은 짙은 안개처럼 머릿속에 퍼진다.
경험적으로 죽음은 일상 속에 실체 한다. 우리는 조금씩 죽음에 다가가는 중이다. 그러다 임계선을 넘으면 죽음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개인마다 그 선에 도달하는 속도나 방식은 다르지만 반드시 선을 넘게 된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임계선을 넘은 사람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누군가의 마지막 뒷모습, 마지막 술자리, 마지막 통화. 마지막이라는 단절이 주는 슬픔은 얼마나 믿기지 않는 것인가를, 가까운 사람의 비극일수록 얼마나 큰 후회에 휩싸이는가를 나는 반강제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부모님과의 대화를 몇 번이고 재생했다. 이런 대화의 반복은 분명 후회할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정말 슬프고 상상하기도 싫지만, 부모님에게 대답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상황이 왔을 때, 나는 얼마나 후회하고자 이렇게 무지하게 행동하는 걸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화기 건너편의 부모님 모습을 상상하며. 이번에는 의도하여 녹음 버튼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대화를 시작한다. 빨간 레코딩 아이콘이 깜빡이며, 부모님과 내 목소리가 녹음된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일상의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수집할 필요가 있다. 쉽게 간과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에는 소중한 대화와 목소리가 많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