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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B Dec 08. 2020

싸울 땐 젖 먹던 힘까지, 치열하게

우리는 정말이지 치열하게 싸웠다.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그 정도로 언성을 높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서 불을 쏘아대고 목이 터지도록 악을 썼다. 지금이야 열에 아홉은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며 포옹과 함께 상황을 넘기지만, 처음부터 이해와 사랑만으로 관계를 유지한 건 아니었다.





우리의 첫 싸움은 ‘오늘부터 연인’이라고 선언한 그다음 날, 콘서트장에서 일어났다.


공연하는 가수는 Jon and Roy라는 포크송을 부르는 그룹이었다. 내가 열렬히 사모하는 그룹 중 하나로 6개월 전, 티켓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티켓을 두 장 구매해두고 콘서트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중이었다. 때마침 내 인생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T에게 콘서트를 핑계 삼아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날 밤이 어떻게 끝날 줄 상상도 못 하고 T를 만나러 가는 길, 내 뱃속을 간지럽히는 나비의 힘찬 날갯짓은 나까지 붕붕 날아올렸다. (사랑에 빠져 두근거릴 때, 영어로는 긴장을 나타나는 표현인 '배속에 나비가 있어.'을 사용한다.) Jon and Roy를 보게 돼서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T와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 앞으로도 이 사람과 같이 즐길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간이기에, 처음으로 좋아하는 걸 공유하는 순간은 언제나 특별하게 다가온다.  


Nothing but everything,
I fall into you tonight.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 전부인 너에게, 나는 오늘 밤 빠져들고 있어)
Flowing forever I'll go,
Warm like the southern light.
(오로라처럼 따스하게 끝없이 흘러갈 거야)
I hear the quiet calling
Coming from out the night.
(그 밤에 울리던,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
I'm knowing here and now,
Always the loving's right.
(내가 여기서에서 지금 알고 있는 건, 사랑은 언제나 옳다는 거야.)

Jon and Roy - Nothing but everything 중에서



콘서트장 맞은편에 위치한 바에서 간단한 저녁과 칵테일을 마시며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리고 T와 함께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T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연장은 시내에 위치한 2층 규모의 홀이었다. 2층이라고 해도 착석은 테이블 몇 개가 전부였기에 전체 입장객의 수는 많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도 공연이 시작되면 스테이지 앞에 서서 가수의 라이브를 들을 수 있도록 내부가 조성되어 있었다. 오프닝 공연이 시작하려면 아직 40분도 넘는 시간이 남았지만 들뜨는 마음에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가수는 내 앞에, 좋아하는 사람은 내 옆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완벽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오프닝 밴드가 공연을 하는 중에 벌어졌다. 오프닝 밴드도 내가 좋아하는 밴드였기에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리듬에 맞춰 움직이며 T의 손을 꼭 잡았다. 스테이지를 바라보다가 T를 보며 빙긋 웃고 다시 스테이지로 고개를 돌리기를 반복했다. 흥취가 물어 익어 가자, T는 공연장 뒤쪽에 위치한 바에 맥주를 사러 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내 옆에 딱 붙어 서 있던 T가 사라지자마자, 내 앞에 있던 여성이 뒤를 돌아봤다. 금발 머리에 짙은 핑크색 립스틱을 두껍게 바르고 노란 크롭탑을 입은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있잖아, 너 정말 아름답다."

"아, 고마워! 너도 참 아름다워!"

(글로 써보니 이상하게 들리지만, 특별한 날에 한껏 꾸민 여성들은 '너 오늘 참 예쁘다'를 인사로 건네며 대화를 시작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콘서트 장에서 대화하는 건 흔한 일이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뭐,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 한마디 한 정도로만 생각했다. 게다가 혼자 콘서트를 보고 있던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은 길어지는 대화에 대한 거부감을 없앴다. 하지만 T가 맥주를 들고 돌아온 순간,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술에 취한 그녀가 내 머리가 이쁘다며 만졌던 게 화근이었다. T는 그녀와 내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며 둘이 보라고 말한 뒤 자기는 집에 가겠다며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뭐? 농담인 줄 알았다.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그는 내 시야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높은 힐에 발이 꼬일라, 꼿꼿이 다리에 힘을 준 채로 뛰기 시작했다. 헉헉거리며 그의 재킷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홀의 입구를 통해 길로 나섰다. 옆에서 콘서트장의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문 밖으로 나서면 재입장이 안됩니다."

"네??"


입구에서 몸만 밖으로 향한 채 그에게 소리쳤다.

"너!! 내가 6개월이나 기다린 콘서트인데 그냥 갈 거야?"

"어. 난 간다. 너는 보던가."


이 미친 새끼가. 진짜 간다고? 내가 그렇게 기다린 콘서트인데? 사귀기로 한지 이제 하루 지났는데 바로 이러기야? 그 뒤통수를 정말이지 한대 갈기고 싶다.


입구에서 벗어나면 재입장이 안된다는 규정을 반복해서 말하는 직원들을 뒤로 한채, T를 잡기 위해 뛰었다.


"너!! 거기 멈춰!! 장난해? 내가 그 콘서트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면서 그런 식으로 나가는 거야? "


시내 한복판에서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뒤돌아보던 T의 눈빛은 좀 전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눈빛과 180도로 달랐다. T 역시 질세라,

"어떻게 아는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거야? 분명히 그 여자는 널 꼬시고 있었다고! 넌 그것도 몰라? 바보야?"

"원래 여자들끼리는 서로 칭찬 많이 해줘. 넌 그런 것도 이해 못해?"


저녁 9시. 가장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간에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거다.'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을 이어갔다. 도로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엮기고 싶지 않다는 듯이 우리를 피해 지나가고, T와 나는 사귀기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최고의 민폐커플로 등극했다. 급 서러워진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공유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내가 왜 길바닥에서 울고 있나? 이게 대체 뭔 일이지?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T를 두고, 난 인사도 없이 뒤돌아 택시를 잡고 집에 돌아왔다.


길에서 서로를 향해 악을 지르던 우리도 시들어진 해바라기처럼 못난 모습이었다.



그 싸움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이었다는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은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누구 하고도 이토록 이를 갈며 으르렁 거린 적이 없다. 하지만 T와는 정말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웠다. 서로를 알기 전에 시작한 관계는 사소한 일도 큰 오해를 불러왔다. 어쩌면 T와 나 둘 다, 이혼을 통해 받은 상처로 인해 이렇게 사랑을 만났다는 현실을 의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싸우는 동안, 이 남자는 나도 몰랐던 나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주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었지만 다 끝나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분노나 섭섭함을 다 쏟아내고 나면,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요함의 힘을 얻어 사과와 함께 포옹을 건넸다.


놀랍게도 싸움이 몇 번 반복되고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자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어졌다.





초기에는 상상도 못 한 언쟁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결국에 우리의 관계가 건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를 위한다는 핑계로 본인을 포기하고 사랑으로 치장하지 않았다는 점.

사랑하니까, 상대방이 원하는 일을 하되 그 마음에는 나, 본인에 대한 사랑이 바탕으로 깔려있었다.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사랑하고 나를 아끼는 상대방에게 더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그리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우리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 버팀목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해본다.



여담으로, 우리의 대화에는 아직도 그때 콘서트장 앞에서 울던 나와 소리 지르던 T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깔깔거리며 서로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바닥에 주저앉아 목이 쉬고 눈이 퉁퉁 붓도록 엉엉 서럽게 울던 나와 “나 갈 거야!”라고 고함지르던 T 중에 누가 더 철없는 아이 같은지 한껏 비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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