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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14. 2023

백수의 월 40만 원짜리 취미

#10. 컴퓨터 작곡 수업 수강기

회사를 나오기 전, 나는 몇 달 동안 번아웃을 겪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아침 해가 뜨는 게 무서웠다. 출근의 공포를 잊으려고 새벽까지 휴대폰 게임을 하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회사만의 문제였다면 진작에 이직했을 거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시키는 곳이었고, 2년 동안 일하며 손발을 맞춘 동료들도 든든했다. 쏟아지는 일이 여우비 같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비가 그치면 선명한 무지개가 뜨던 날들. 그 무지개를 보고 싶어서 비가 기다려졌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빗방울이 굵어졌다.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가 길고 지루한 장마로 이어졌다. 이 비가 그치긴 할까, 몸도 마음도 눅눅해졌다. 쏟아지는 일을 해치우는 건 고장난 배팅기가 던지는 야구공을 끝없이 받아치는 기분이었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야 했다. 마침 친구가 듣고 있다는 전자음악 작곡 수업에 마음이 갔다. 음악 듣는 걸 좋아하니까 만드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악기 연주를 배울 때처럼 지루한 연습을 할 필요 없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오직 수업료였다. 내가 10년 전 냈던 한 달 고시원 방값이랑 비슷했다. 이렇게 큰돈을 취미에 쓰는 게 맞나? 싶다가, 이만큼 큰돈을 취미에 쓰는 사치를 부리고 싶어졌다.


수업료를 입금한 날, 오랜만에 마음 뿌듯해져서 혼잣말을 했다.

‘이 맛에 돈 벌지!’

그러고 일주일 만에 돈벌이를 못하게 되었지만.


음악 선생님 작업실은 집에서 30분 거리였다. 버스를 타면 20분 만에 도착하지만 왕복 1시간을 걸어서 2천 원을 아꼈다. 실업급여 받는 백수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수업은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흥미로웠다. 작업실에 갈 때보다 2시간 수업 듣고 돌아올 때 발걸음이 더 가벼웠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어제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언제나 헷갈렸던 기타와 베이스 소리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3달이 지났다. 숨었던 재능을 찾았다거나, 선생님이 놀랄 만큼 멋진 곡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음악은 만들 때보다 들을 때 더 신난다. 아직도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릴 만한 곡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업료가 마냥 아깝지 않을 무언가를 얻었다.


신나는 음악이 좋다, 정도로 단순하게 표현하던 내 취향이 더 선명해졌다. 내가 숙제로 분석해 온 곡을 듣던 선생님은 나의 취향이 ‘그루브 있는 음악’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몇 마디 어설프게 찍어 본 멜로디가 모두 정박이 아닌 엇박이라는 것도. 가사를 외울 만큼 들었던 언니네 이발관 ‘인생은 금물’이 레게의 엇박으로 진행된다는 걸 배웠을 땐 소름이 돋았다.


내가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작곡 수업이 비를 피할 우산이 되어주었다’고 썼을 거다. 하지만 백수가 된 다음부터 인생이 화창해졌고, 우산을 들어야 할 만큼 큰 비가 내리지 않는다. 맑은 날에 무거운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게 조금은 버겁다. 이번 달부터는 매주 듣던 수업을 격주마다 듣는 것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가방 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우산이면 충분하다. 예쁜 우산이라 가끔은 해가 쨍한 날 양산으로 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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