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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02. 2023

30대의 사랑니, 전쟁과 평화

#16. 30대가 첫 사랑니 뽑는 게 어때서

입안에 작은 폭탄 네 개를 품고 살아온 30여년. 그동안 만나 온 의사들은 관리가 어려우니 언젠가는 처리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불발탄일 거라고 믿어 왔다.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태라면 당장 수술 날짜를 잡자고 하지 않았을까. 마음의 준비를 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의사에게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 함께할 수 있을지도.


나의 사랑니 네 개는 너무나도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칫솔이 닿기 어려운 곳에 났다는 것만이 걱정거리였다. 옆으로 눕지도 않고, 다른 치아를 건드리지도 않아 급하게 뽑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내가 양치 잘 할 테니까 너희들도 사고치지 말자. 그렇게 휴전 협정을 맺어왔다. 서로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지난 주말까지는.


지난주 토요일, 오른쪽 턱이 너무 아파서 늦잠도 못 자고 깼다. 가끔 피곤하면 턱 밑이 붓곤 해서 이번에도 그런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고부터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아픈 곳을 가만히 살펴 보니 세상에. 사랑니가 예고도 없이 배신을 한 거였다. 얼굴을 내밀고 있던 아래쪽 사랑니가 어느새 잔뜩 부은 잇몸에 덮여 있었다. 생전 처음 겪는 치통이었다.


급하게 사랑니 전문 치과를 찾아 예약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고 내일은 예약이 모두 차서 울 뻔했는데, 채팅 상담을 진행했더니 약 처방 정도는 가능할 듯하다고 내일 오전에 오라셨다. 병원 있는 곳에 여러 번 절을 했다. 그날 하루는 집에 있던 타이레놀을 먹으며 버텼다. 살면서 타이레놀을 하루에 네 번이나 먹은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도 효과가 좋지 않아서 밤에는 2시간에 한 번씩 잠을 깼다.


드디어 일요일. 치과 가는 게 기다려지는 건 처음이었다. 눈 뜨자마자 치과로 달려가 한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받고 며칠 기다렸다 뽑기, 붓기 때문에 마취를 여러 번 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뽑기. 마침 오늘 환자 한 명이 오지 않아 바로 뽑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일평생 전자를 선택한 사람이었지만 고통은 사람을 바꾼다. 선생님, 가능하면 제발 당장 뽑아주세요.


30여 년을 품어온 오른쪽 사랑니 두 개를 그렇게 보내주었다. 마취하는 것만 조금 아프고 기다리는 시간만 오래 걸렸지, 아랫니 10초 윗니 5초 만에 배신자들이 처단되었다. 거즈를 문 채 가지런히 뽑힌 사랑니를 확인하였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처리했어야 했다. 용기가 없어 일을 키웠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볼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월요일 출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백수여서 천만다행이다.


사랑니와의 전쟁을 치르고 친구 한 명에게 결과를 전했다. 친구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사랑니를 이제야 뽑았다고? 이 나이에? 나 좀 웃어도 됨?”


친구라 익명성을 챙겨 준 거지, 아니었어 봐라. 사랑니 발치의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는 어른들을 도발한 죄는 무섭다. 아프기 전에 뽑는 게 좋다지만, 아프지 않으니 그대로 잊은 척하며 살아 온 우리. 안티 사랑니 클럽의 멤버들은 세계 곳곳에 제법 분포되어 있다. 나는 첫 딸을 낳기 전부터 품어 온 사랑니를 며칠 전에 뽑은 50대 여성, 문제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가 염증이 생기고 뽑게 된 30대 남성을 알고 있다. 그들과 나는, 우리는 쫄보가 아니다. 고통을 서둘러 겪지 않아도 괜찮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비록 나는 사랑니 두 개를 보냈지만, 사랑니 뽑지 않은 어른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니 발치를 결심한다면 크게 박수 치며 응원하고 싶다. 사랑니의 반란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사랑니 때문에 염증이 생기는 게, 사랑니 뽑고 난 다음 통증보다 훨씬 아프다. 병원에서 권한다면, 일주일 이상 약속이 없는 기간이 있다면 해치워 버리자. 우리는 살면서 제법 많은 고통을 겪어 왔다. 사랑니를 뽑는 게 우리 인생에서 제일 아픈 경험은 아닐 것이다.



+ 언젠가 사랑니를 뽑아야 할 분을 위한 작은 팁 5가지


1) 사랑니가 붓거나 아프면 바로 치과에 가세요. 잇몸이 부으면 발치가 안 되니까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참지 마시고요. 병원에서 처방하는 항생제와 진통제를 먹으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대요. 붓기가 빠지지 않아도 의사 판단에 따라 바로 발치 가능한 경우가 있어요. 제가 그렇게 뽑았는데, 마취도 잘 듣고 뽑는 것도 아프지 않았어요.


2) 사랑니는 전문 치과에서 뽑는 걸 추천드리고 싶어요. 대학병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랑니 전문 치과가 꽤 있더라고요. 평소 다니던 치과에서는 사랑니를 ‘여기서 뽑을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고 했었는데, 전문 병원에서는 '쉽게 뽑을 수 있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시더라고요.


3) 사랑니 뽑고 난 다음 사나흘 이상은 푹 쉬셔야 할 거예요. ‘생각보다 안 아픈데?’ 싶어도 꼭 쉬세요. 저는 뽑고 난 다음 날보다 다다음 날이 좀 더 아팠어요. 일주일 정도는 약속이 없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4)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뽑고 나서 문제가 생겼을 때 병원에 방문할 수 있는 날짜로 예약하세요. 공휴일이나 병원 휴무일 전에 뽑는 것보다 마음이 편해요. 혹시 주말에 다녀오신다면 근처에 여는 약국이 있는지 전화로 미리 확인해 보시고요(처방 받은 진통제를 바로 먹어야 해요).


5) 가장 중요한 거. 생각보다 아프지 않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사랑니 발치 전에 염증 나서 부었던 게 50배 더 아팠어요. 뽑는 건 마취 했으니 당연히 안 아프고, 마취 주사도 잠깐 따끔한 정도예요. 저는 마취가글이나 마취연고 바르지 않고 무통마취 기계를 쓰는 곳에서 뽑았는데, 참을 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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