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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19. 2023

돈이 없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15. 백수 생활, 그만두는 것과 계속하는 것

지하철 출구를 나오고서야 알았다. 오늘은 외출을 할 만한 날씨가 아니라는 걸. 한 시간 전까지 방울방울 떨어지던 비가 어느새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다.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가는 게 망설여질 정도다. 신발도 바지 끝자락도 금세 축축해지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미룰 수 없는 인사를 해야 할 날이니까.


월 40만 원짜리 음악 작곡 수업을 그만두기로 했다. 수업은 여전히 재밌다. 그렇지만 이제는 수업을 듣는 마음이 편하질 않다. 실업급여 받는 기간이 2달밖에 남지 않았다. 기꺼이 백수 생활을 그만둘 만큼 좋은 회사를 찾아야 하니, 이력서 넣고 면접 보는 기간도 미리 확보해야 한다. 한두 달 치 생활비는 더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게 음악 수업은 사치다.


직장인 시절 나는 가랑비에 옷 젖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몇백만 원씩 하는 가방이나 옷은 비싸다며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그 이상의 돈을 이상한 데 펑펑 썼다. 아이맥이나 맥북 같은 전자기기는 쓸 데라도 있지. 몇십 권씩 쌓아두는 책은 언젠가 펼쳐보기라도 하지. 가장 방탕하고 한심하게 돈을 쓰던 건 배달 음식이었다. 파스타를 주문한다 치면, 오일 파스타랑 크림 파스타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해 둘 다 시키는 식. 다 먹기라도 하면 몰라, 허세 심한 내 위장은 산더미 같은 음식 앞에서 매번 쪼그라들곤 했다.


그땐 배달음식이 가장 싸게 먹히는 행복이었다.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사는 게 맞지 않나. 백수가 되고 회사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먹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힙한 백수가 되는 데 돈을 썼다. 물론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였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요즘 뭐 하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자존심을 지킬 멋진 답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 요즘 아침엔 필라테스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작곡이랑 소설 쓰기 배워,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쁘다니까, 하려고.


이제 얄팍한 자존심을 위해 쓸 돈은 없다. 그러자 쉽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음악 수업을 그만두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소설 수업은 계속 듣기로 했다. 음악 수업이 소설 수업보다 훨씬 재밌는데, 힙한데,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 연습하게 되는 건 소설 쓰기다. 잘 쓰는 수강생들 사이에서 자존심 상하면서도 그만두고 싶지 않다. 지난번보다 조금만 더 잘 써 보자, 그 마음으로 계속하게 된다. 직장인이 되어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번엔 주말 수업에 등록했다.


활짝 우산을 펼쳤다. 찰방찰방 물웅덩이를 밟으며 빗길을 나선다. 레인부츠가 있으면 좋았으려나, 우비를 하나 장만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있대도 비를 완전히 피할 순 없을 거다. 지금 꼭 필요한 건 튼튼한 우산 하나뿐이다. 돈이 없으니 비로소 보인다. 무엇을 아껴서 무엇에 쓰고 싶은지. 무엇을 정말로 하고 싶은지. 무엇이 비 오는 날 나의 우산이 되어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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