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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05. 2023

게임오버, 컨티뉴를 누르기 전에

#13. 젤다의 전설 250시간 하면서 배운 것

“아직도 보스 깨는 중?”
방에서 웹툰 보던 최측근이 나왔다. 그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 조금만 더 하면 깰 것 같은데.”
“흠.”
최측근이 냉장고에서 스크류바를 꺼내와 앉았다. 그동안에도 한 번 죽었다.


컴퓨터 음악 작곡이니, 소설 쓰기니, 멋진 말을 늘어놓아 봤자다. 백수 되고 제일 열심히 한 건 게임이다. 지난 5월부터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시간을 털어 게임을 했다. 내일 출근할 걱정 없이 밤새 게임하는 게 꿈이었는데 드디어 이뤘다. 오픈월드 RPG는 못 참지.


나는 게임 속 세계에서만큼은 극 외향형 인간이 된다. 지나다니는 NPC 하나하나 말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들이 세계 멸망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이게 바로 용사의 자질인가? 내가 아니면 누가 하이랄을 지키겠어! 대단한 사명감을 짊어지고 게임에 임했다.


문제는 나의 게임 컨트롤이 사명감과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중간보스 한 놈 잡는 데 몇 시간을 쓰는 중이다. 적의 체력을 4분의 1정도 남겨둔 지점에서 자꾸 죽어버린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그렇게 몇 십 번이나 게임 오버 화면을 봤다. 최측근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그랬다. 이번에도 죽고 지루하게 컨티뉴를 누르는데 최측근이 한 마디 보탰다.


“너 계속 똑같은 상황에서 죽는다.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때? 무기를 바꿔본다거나.”


다 깨려면 한참 걸리겠네. 나 먼저 잔다. 최측근은 다 먹은 스크류바 막대를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무기가 아니라 내 실력이 문제라고, 투덜거리면서 한 번 더 시도해봤지만 또 죽었다. 죽었으니 다시 시작해야지, 컨티뉴 버튼을 눌러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려는 찰나, 잠깐.


이제 보니 최측근의 말이 맞았다. 보스가 필살기를 쓰고, 그 필살기를 피하고, 그러면서 서둘러 보스를 한 대 더 때리려다 내가 맞아 죽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방식으로 클리어하려면 보스의 공격 패턴을 빗겨가는 운에 맡겨야 했다. 이대로 한두시간 더 하면 깰 수는 있을 거다. 내 능력이 아니라 운으로.


하는 일을 하던 방식대로 대로 잘하는 건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장점은 언제나 마감을 지켜 나쁘지 않은 퀄리티의 작업물을 내놓는다는 거고, 단점은 새로운 방식의 무언가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거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으니까, 단점을 보완하는 것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효율이 좋을 것 같아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단점이라기보다 머리를 쓰지 않겠다는 게으름을 방치하는 것 아닐까?


비슷한 일을 계속하다 보면 관성이 생긴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그리고 대개는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면 거기서 조금 더 머리를 써야 한다. 하던 방식대로 아슬아슬하게 해내는 걸 반복하면 지루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 노력도 귀찮아한다면 용사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 그리고 머리를 쓰는 편이 더 재밌다.


이상, 게임 하나를 250시간이나 재밌게 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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