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3번째 소설 쓰기 수업을 듣고
새벽 세 시 반, 한 달을 붙잡은 소설에 마침표를 찍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낮이었다면 집 근처라도 빙빙 돌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마음만 방방 떴다.
백수가 되고 세 번의 소설 쓰기 수업을 들었다. 소설. 언젠가 써 보고 싶은 글이었고, 시간이 생겼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 등단하고 오랫동안 활동해 온 선생님들이 강의하는 아카데미가 있었다. 이론도 배우고, 직접 쓴 소설 합평도 하고, 그러다 등단한 작가들이 많다고 했다. 혹시 나도? 두근두근.
첫 번째로 들은 건 손바닥 소설, A4 2장 정도의 단편을 쓰는 수업이었다. 그 정도 분량이야 매주 에세이로도 쓴다. 뚝딱 썼고 열심히 퇴고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건 우리 엄마를 위한 말이다. 엄마는 항상 젊었다. 다른 어머니들이 곱슬곱슬 파마를 하고 생머리를 질끈 묶던 시절부터 세련된 숏컷을 고수해 온 그녀. 자외선이 노화의 적이라며 집 안에서도 선크림을 발랐고, 잠깐 집 앞 시장에 갈 때조차 엷은 화장을 빠뜨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축제 때는 어머니들과 깜짝 무대를 준비해 소녀시대 춤을 추기도 했다. 무대 위 엄마는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셨고, 깜짝깜짝 놀란 나는 낯뜨거워 고개를 푹 숙였었다.
- 첫 번째 소설(?), <소녀 은퇴> 중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글을 다듬었다. 그 덕에 모든 문장이 매끄러웠다. 처음 썼는데 이 정도면 제법 아냐? 한껏 솟은 어깨를 누르며 강의실에 들어갔다. 칭찬 들을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는데, 합평을 시작하고 금세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쪼그라들었다.
잘 읽혀서 좋은데, 읽고 나서 남는 게 없는 느낌?
인물들의 캐릭터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대화나 설명 말고, 묘사로 장면을 보여 주면 좋겠어요.
내가 쓴 게 소설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에세이 쓰던 가락이 소설에 녹아들었나 보다. 일부러 나랑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 썼는데 뭐가 문젤까. 자존심이 상했다. 에세이는 평생 써 왔고, 회사에서도 글 쓰는 일을 한 지 7년이 넘었는데. 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내가 쓰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니 조금만 더 배워 보자 싶었다.
첫 번째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음 수업을 찾아 등록했다. 이번엔 단편소설 입문반, A4 10장 분량의 소설을 쓰는 수업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분량으로 쓰기 어렵다면 A4 5장만 넘겨도 괜찮다고 했다. 이번에 내가 완성한 소설은 A4 6장 분량이었다.
엄마네 집은 낡은 청록색 기와에 벽돌로 지어진 구옥이었다. 미진의 원룸 보증금이면 살 수 있는 곳인데도 방이 세 개나 되었다. 도착한 첫 날, 빨랫줄에 걸린 이불과 베갯잇이 바람을 맞으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깨끗한 공기에 섞인 비누 냄새가 포근했다. 장판을 반짝거리게 닦아 둔 방이 미진의 차지였다. 햇볕에 따뜻해진 손잡이를 잡는 게 좋아 미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환기를 시켰다. 심심하면 마당 텃밭에서 자라는 대파를 구경했다. 쑥쑥 자라 어제랑 오늘 키가 다른 게 신기했다.
실업급여는 다음달부터 끊길 것이다. 전세 재계약은 4달 반 남았다. 괜찮아? 앞으로 어떡할 거야? 주변의 걱정에 미진은 온갖 괜찮은 이유를 늘어놓곤 했다. 실업급여 받으니까, 몸 건강하니까, 요즘 시대에 평생 직장은 없으니까 괜찮아.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 앞에 꼬박꼬박 핑계를 덧붙이는 게 그 증거였다. 미진은 조금 더 여기에 숨을 생각이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자신의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때까지.
- 두 번째 소설, <낭만의 시대, 그 후> 중
좋은 소설은 결국 장면이 남는 소설이랬다. 장면을 묘사하자, 설명하지 말고. 수업 내내 들었던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썼다. 쓰고 싶은 장면을 떠올리고, 그 장면들을 얼기설기 붙여 완성했다.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소설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된 듯싶었다. 내가 쓴 소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나부터 알 수 있었다. 다만 이걸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감도 오지 않았다. 그대로 냈더니 이번엔 용두사미라는 평을 받았다.
빠르게 읽혀서 좋지만, 좀 더 밀도가 있으면 좋겠어요. 각 장면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르면 어떨까요.
앞 부분은 좋았는데 중반 넘어서부터 묘사 대신 설명이 많아지네요.
잘 나가다가 중간부터 왜 방향을 틀었지? 라는 느낌.
이번엔 모든 피드백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장면을 잘 쓰려다 보니 뒤로 갈수록 소설의 주제가 흔들거렸다. 뭘 써야 하는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다. 그걸 바로잡을 능력은 아직 없지만, 성과는 분명히 있었다. 첫 번째 썼던 소설의 피드백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칭찬을 못 받아서 섭섭하다니. 그 글은 칭찬을 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소설 수업에 가짜 에세이를 써서 가져간 셈이었으니.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이번에 들은 소설 플롯 수업이다. 들을까 말까 고민 많이 했다. 처음 쓴 소설로 신춘문예 당선된 작가들도 있다던데. 나에게 그런 재능이 없다는 게 명확했다.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니 다른 게 보였다. 어쨌든 나아지고 있다는 거. 첫 번째 소설보단 두 번째 소설이 더 소설 같다는 거.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뭐든 삼세 번은 해 봐야 한댔다. 딱 하나만 더 써 보자.
이번 목표는 간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길 잃지 않고 A4 10장 채운 소설을 쓸 것. 에세이처럼 쓰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 조금은 내 이야기를 써도 될 것 같았다. 몇 년 전 에세이로 썼던 사건 하나를 가져왔다. 인물과 배경을 모두 뜯어고치고 갈등을 쭈욱 잡아늘렸다. 그게 오늘 마감한 소설이다.
“마리, 여기가 첫 회사라고 했죠?”
베스트가 마리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까만 눈동자가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해 마리는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베스트는 오늘도 회사 로고가 박힌 까만 후드집업을 입고 있었다. 처음엔 새하얬을 로고가 잿빛으로 때 탄 지 오래였다. 괜히 움츠러들지 말자, 마리는 책상 아래로 주먹을 꼭 쥐었다. 대표라고 해 봤자 배 나온 30대 초반 남성일 뿐이다. 마리는 다시 베스트의 눈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 세 번째 소설, <스타트업 레슨런> 중
여전히 소설 쓰는 건 고통스럽고, 소설가가 되는 건 요원해 보인다. 어찌저찌 완성은 했다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분명 이틀 후 합평 때 신명나게 얻어맞을 것이다. 그치만 나는 안다. 이전에 썼던 두 편의 소설보다 이게 낫다. 이게 더 소설 비슷하다. 같이 글 쓰는 문우들의 피드백이 더 소설다운 소설을 쓰도록 도와줄 거다.
잠이 오지 않는 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하나만 더 써 보자. 다음에 쓸 소설이 이번에 쓴 소설보다 좀더 좋을 것 같다. 그렇게 10편, 20편 쓰다 보면 그럴싸한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선생님이 그랬다. 10편 안 쓰고 등단하면 천재, 20편 쓰고 등단하면 수재, 30편 이상 쓰고 등단하면 범재라고. 하지만 일단 등단하면 노력하는 범재들이 오래 간다고.
수업을 하나 더 듣게 된 건 아카데미에 도는 소문 덕분이기도 했다. 이번에 등단한 소설가 한 명이 이곳 출신인데, 습작까지 하면 50편은 쓰고 등단했다나. 처음부터 이만큼 잘 쓰는 분이 아니었댔는데 등단작은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게 뛰어났다. 계속 쓰면 재능이 없어도 잘 쓰게 된단 말이지. 나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궁금해졌다.
벌써 새벽 여섯 시가 넘었다. 28만 원짜리, 네 번째 소설 수업을 결제했다. 그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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