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5 욕조

입을 가득히 벌린 철제 욕조를 밟고 선 그녀의 모습. 마치 비너스 같았지

by 류인환

그녀가 떠난 지하실. 닫힌 철문에는 어떤 빛도 새지 않아. 욕조에 일던 불길은 금방 사그라들었어. 별안간 조작부 화면에 빛이 들어.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가 뚜렷해져. ‘비상사태 – 원본 재생.’ 철제 욕조는 막 잠에서 깨어난 생물처럼 음- 음- 하는 옅은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어. 그리고 커다란 주둥이를 닫아 어머니를 삼켜버렸지. 욕조 주둥이 사이로 빛이 번뜩이고 있어. 틈 안쪽에서 바쁜 일이 일어나고 있나 봐. 가로 선의 또렷한 밝음 사이로, 기계 움직임이 검은 점으로 연신 두리번거려.


그날 밤이 지나고 낮.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을 때. 지하실에서 울음 섞인 소리가 새어 나왔어. 그어- 음파- 짝을 찾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혹은 아기의 외침 같기도 했지. 닫힌 지하실은 연신 괴성으로 가득 찼어. 사흘이 지났을 때, 울음소리는 단어로 변했어! 한마디 또렷한 외침이 욕조 주둥이 밖으로 찔러 나와. “엄마!”


기계음이 멈췄어.서서히 인큐베이터가 입을 열기 시작해. 벌어지는 주둥이에서 빛과 증기가 뿜어 나왔지. 메말랐던 목욕탕은 금세 백색 안개로 가득 찼어. 천둥을 머금은 구름 단층 그 중심, 욕조에서 떠오르는 물체가 보여. 욕조 난간에 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와 얹혀! 피부는 예전처럼 보드라워. 은하수처럼 세밀한 입자가 박힌 유백색 욕조 수면 위로 검은 머리카락, 하얀 등허리가 솟아올랐어. 욕조 위로 몸을 일으킨 그녀. 기다란 두 팔을 들어 길게 기지개를 켰어. 살가운 얼굴로 진한 여운을 내뱉었지. “하.” 그녀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해. “엄마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어머니는 다시 태어난 거야. 욕조에서 만들어진 많은 그녀들 중, 누구보다 원숙했고 아름다웠지. 지금. 입을 가득히 벌린 철제 욕조를 밟고 선 그녀의 모습. 마치 비너스 같아.




베누스의 탄생, Sandro Botticelli




그녀는 빛과 증기로 밝혀진 욕실 안을 둘러보았어.


엄마들이 딸을 만들었던 거대한 장비들은 뒤틀리고 타버린 지 오래였지. 그녀는 말없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어. 머릿속 어머니들이 내뱉는 탄성과 절규 섞인 말을 잠자코 듣는 중이야. 엄마들 중 울부짖는 이도 있었고, 화내는 이도 있었어. 그녀들은 윤회의 수단. 그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비를 잃어버렸으니까. 눈꺼풀에 눈물이 고였어. 한쪽 입꼬리는 울상을 짓고, 다른 한쪽은 이를 악물고 있었지. 그녀들의 말 하나하나가 표정을 지배했어. 그녀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낸 뒤, 환히 웃으며 말했어. “엄마들. 나도 재생했잖아, 장비는 멀쩡할지도 몰라.”


서둘러 장비를 매만졌어. 하지만 철제 욕조는 제 모든 힘으로 그녀를 살린 것인지 더는 반응하지 않아. 욕조 속 해와 구름은 저물어갔어. 허겁지겁 조작부의 증기를 닦아냈어. 화면은 점점 흐릿해져. ‘복구 완료’라는 글씨도 사라졌어. 벽을 더듬어 욕실 불을 켰어. 창백한 푸른 등은 삭아버린 복제실의 잔해를 드러내었지. 멀리 중앙컴퓨터에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보여! 달려가 커버를 뜯어냈어. 마리나의 기억을 관장하는 수정 디스크에 은색 총알이 박혀있어. 그녀들은 직감했지. 마리나는 영원히 죽었다는 걸. 딸들의 기억만 남게 된 거야. 그녀는 헐벗은 몸으로 깨진 수정을 힘껏 안고 주변을 훑어보았어. 욕조 귀퉁이에 버려진 불쏘시개가 보여! 그녀들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낡은 플라스틱 불쏘시개. 성인이 된 딸들은 그것으로 어머니를 태우곤 했어.


그래. 딸이 생각났어. 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어.


강도와 몸싸움을 벌이다 총에 맞아 죽었지. 그 순간 생각나는 것. 자신이 죽어갈 때 바라보던 딸의 무표정한 얼굴. 딸이 자신에게 했던 말. ‘실패한 년.’ 그리고 ‘엄마를 위해 강도를 막아줄 수 있겠니.’ 어쩌면 딸이 농락한 것일지 몰라. 수치심이 들어. 그을음 가득한 바닥 위로, 하얀 발자국이 보여. 딸의 발자국이야! 그녀는 몹시 눈동자를 흔들었지. 그리고 외쳤어.


“맞아 엄마. 내 딸이 불을 지른 거야! 그리고 기계를 망가뜨렸어.” 무릎을 꿇어 딸의 자취를 매만지며 발자국을 쫓아 황급히 기어갔어. “이년이 그런 거야! 엄마. 내 딸이 우리들을 죽여버렸어. 엄마들의 삶. 엄마들의 꿈. 모두 그년이 벌인 거야. 실패한 년!”


목욕탕 입구까지 기어간 그녀는 몸을 일으켰어. 철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말했지. “알겠어. 내가 잡을게. 그리고 벌을 줄게. 그 남자도 내가 어떻게든 찾을게 걱정 마. 엄마. 할머니.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집안은 추웠어. 어디선가 바람이 계속 불어왔지.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은 채 주변을 살폈어. 어떤 기척도 없어. 불쏘시개를 꽉 쥐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허공에 겨냥했어. 언제라도 딸을 찔러버릴 듯이. 거실에는 아무도 없어. 현관은 열려있어. 딸의 흔적이라고는 남겨진 옷가지 몇 벌. 나뒹구는 식기 뿐이야. 거실은 황량했어. 벽에 걸린 마리나의 사진 말고는 온통 그을음으로 가득했지. 그녀는 확신했어. 어쩌면 정말 딸이 지하실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모든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집안에는 아무도 없어. 침실에서 반쯤 서랍이 열린 옷장을 발견했어. 그녀들이 좋아했던 붉은 벨벳 잠옷 수십 벌이 남겨져 있었지.


서랍 옆 비스듬히 걸친 거울을 보았어. 액자만큼이나 풍성한 덩굴무늬가 새겨진 거울. 그녀들은 액자 속 사진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곤 했어. 지금 그녀는 잿더미를 덮어쓴 꼴이야. 익숙한 동선으로 곧장 욕실로 걸어가 수전을 틀어. 응축된 물결은 그을음을 벗겨냈어.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키득거렸지. “엄마, 아무도 없어. 우리들 뿐이야. 걱정 마.”


잠시 후 붉은 벨벳 잠옷을 걸친 그녀가 다시 거울 앞에 섰어.


장미 잎사귀처럼 번들거리는 붉은 잠옷. 드러난 하얀 쇄골 위로 피어난 긴 목. 가시처럼 짖은 눈썹.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허리춤까지 늘어난 검은 머릿결. 거실에 놓인 액자 속 인물과 똑같았지. 문득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 알아챘어. 다리가 멀쩡하다는 걸! 그러고 보니 지금처럼 쉽게 계단을 걸어 오르내린 적이 없다는 걸. 발을 내려다보았어. 피가 흐르고 있어. 그녀는 선채로 한쪽 다리를 가볍게 들었어. 발바닥에 깨진 유리조각이 박혀 있었지. 라벨 스티커가 붙어있었어. 수년 전 자신이 딸에게 던진 술병이었지. 건강하고 흠결 없던 딸이 생각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유리조각을 뽑아냈어. 그런데,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 헤벌쭉한 입꼬리로 말했어. “엄마 이것 봐. 아프지 않아. 다리가 너무 아파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술이 아니면 참을 수가 없었잖아. 엄마. 거울 속 내가 보여? 멀쩡해! 이제 나도 액자 속 어머니들과 똑같잖아!”


그녀는 거실로 돌아와 검은 소파에 몸을 털썩 뉘었어. 발바닥을 들어 보았지. 상처가 조금씩 옅어지는 중이야. 한참 동안 발바닥을 매만져보았지. 곧 상처는 흔적 없이 아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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