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6 목성

빌딩 안 우주에서 그는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되곤 했지.

by 류인환

목성은 할아버지에게 주문을 받았어.


오늘 저녁. 누군가에게 장미 만송이를 배달하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주문이었지. 많은 양도 아니었거든. 수천 개의 튤립. 수만 개의 국화. 예식을 치를 때마다 사람들은 셀 수도 없는 양의 꽃을 사 가곤 했어. 그들은 늘 넘치는 생기를 원했지. 샘플을 집어 체취를 한 아름 들이킨 뒤 바닥에 버리는 사람들. 그들이 돌아설 때 할아버지는 투덜댔어. 꽃의 목숨이 종이 한 장보다 못하다고. 예전에는 장미 백 송이도 엄두를 못 내던 사람들이었다고. 목성은 늘 그렇듯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할아버지를 놀렸어. 꽃에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비쌌냐고.


목성은 화훼 빌딩을 돌아보는 걸 좋아했어. 할아버지가 세운 10층 건물은 오로지 꽃을 만드는 용도야. 수십 년 전 수직재배라는 개념이 꽃집에도 적용되면서 할아버지는 평생 일궈온 화원을 팔아야 했지. 지면에서 피어나는 꽃은 더는 상품가치가 없었으니까. 사람들은 조그마한 생채기도 용납하지 않았어. 빌딩에서 태어난 흠잡을 데 없이 풍성한 꽃. 살아있는 빌딩은 이제 할아버지가 짊어질 수도 없는 양의 꽃다발을 만들었어.




흙내음이 가득히 배인 실내를 걸었어. 가로, 세로 각 50미터. 정방형의 흑색 공간. 6면 모두 진회색 셰일 타일로 덮였어. 벽은 습기를 머금어 반질한 얼룩을 새겼어. 성운처럼. 그래서 이곳은 마치 밤하늘 혹은 우주 같았지. 높이 4미터의 반듯한 천장까지 이어진 철제 구조물에는 폭 5미터나 되는 정방형의 초원이 수십 층으로 겹겹이 펼쳐져 있어. 각 층마다 선별된 꽃이 빼곡히 박혀 있어.


비를 내리고 바람을 불어대는 공정을 따라 구름처럼 비행하는 거대한 풀밭들. 목성에게 이곳은 다른 차원의 세계야. 자신의 눈짓에 따라 땅이 갈라지고 덮이는 곳. 자신의 목소리로 일으키는 비와 바람. 빌딩 안 우주에서 그는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되곤 했지.


9층으로 올라갔어. 다른 층과 달리 이곳은 백색이야. 모든 면이 크림처럼 하얀 대리석 타일로 덮인 곳. 정사각형의 타일은 서로 5 밀리미터의 간격을 두었지. 전등 같은 건 없었어. 대신 그 5 밀리미터의 격자 선에서 빛이 새어 나와. 바닥을 딛고 일어선 테이블과 장비들이 아니었다면 어디가 천장이고 벽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거야. 최근 목성은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 바닥에 흩뿌려진 알루미늄 캔에는 풍성한 흙과 짙은 유백색 액체가 담겨 있었지. 목성은 공간 한가운데 덩그러니 세워진 철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어. 책상 위에는 온갖 전선을 휘감은 유리 수조가 있어.


목성이 나지막이 읊조렸어.

“품명 니코의 장미. 수량 30개. 복제 시작.”


유리 수조에 반쯤 담긴 투명한 액체. 그의 지시를 시작으로 조그마한 미백색 덩어리가 생겨났어.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지. 그들은 곡예를 부리듯 벌어지고 응축하다, 점차 푸른색의 가는 줄기들로 변했어. 줄기 끝단에서 피어나는 붉은 꽃봉오리. 눈 돌릴 새 없이 풍성한 장미 수십 송이가 가득 찼어. 남은 액체는 배수관을 통해 빠져나갔지. 수조에 덩그러니 남은 벌거벗은 장미 다발은 제 체온을 증기로 나타내고 있어. 목성은 미지근한 꽃 하나를 집고는 구석구석 훑어보았어. 가시 없이 반듯한 장미 줄기 아래 좀 먹은 듯 구멍 하나가 뚫려 있어. 수조에서 단시간에 원숙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 아직은 쉽지 않았지. 기계가 말했어. 다음번엔 시간을 조금 늘려보자고. 목성을 알겠다 말하고는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어.


분쇄기에 갈려지는 장미 다발을 보며, 목성은 문득 생각했어. 생명이 탄생하는 아름다운 광경.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면 얼마나 더욱 자신의 마음이 뭉클거릴까 하고.




할아버지가 말해준 신화가 떠올라. 바다 한가운데 거품이 일어 태어난 여신. 그것이 이 9층 실험실 욕조에서 두 발을 딛고 태어난다면 얼마나 설렐까. 물론 상상뿐이야. 함부로 인간을 복제한다는 건, 형벌을 각오해야 하니까. 어쩌면 사회에게 생명을 빼앗길 수 있어.


사람들은 죽음을 극도로 혐오했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야. 더는 늙지 않는 세상. 어떤 질병도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어. 웬만한 사고로는 흉터 하나 남지 않아. 늘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웠어. 복구가 불가능하니까.


수년 전에 들었던 뉴스가 떠올랐어.


누군가 자신을 복제하다 적발되었던 사건. 사람들은 경악했지. 제물을 바치듯 끝없이 자신을 복제했던 여자. 복제품이 태어나면 자신을 죽였지. 그리고 그 복제품 역시 또 다른 복제품을 만들었어. 이유는 알 수 없었어. 누군가는 사이비 종교의 만행이라고 주장했고, 누군가는 행위예술이라고 했어.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어. 생명을 창조한 대가로 사회가 죽음을 내리려 했지만, 이미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후였다고. 대신 그 여성의 복제기기를 불능으로 만들었어. 하지만 인큐베이터 안에 담겨있던 여자아이는 그대로 두었다고 말했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가 짧게 대답했어. 이미 태어난 것에는 죄가 없다. 그것으로 사전은 종결되었어. 여자아이는 아직 살아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사회는 그 여자의 행방을 공개하지 않았어. 여운만 남았지.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초월한 여자. 사회가 눈감아 준 여자아이의 행방. 사람들은 한동안 민담처럼 그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어.




목성은 황급히 손목시계를 들췄어! 어느새 밤 11시야. 오늘 저녁 만송이의 장미. 잊고 말았어.


다급히 외쳤어. “오늘 장미 만개!” 백색밀실은 사진을 펼쳤어. 낡은 주택 주위로 장미들이 흩뿌려져 있었지. 꽃은 이미 제시간에 뿌려졌어. “하-” 그는 한숨을 짙게 내뱉고 집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어. 불 꺼진 창. 아무도 없을까. 아니면 잠들었을까. 꽃은 보았을까. 날개 달린 바구니들이 꽃을 뿌리는 장면을 돌려보았어. 탁한 유리창엔 카메라를 막아내는 필름 따위도 붙어있지 않아. 방치된 집 같았지. 가로등 불빛에 훤히 드러난 거실에 누군가 있어!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 술을 들이켜고 있었지. 마치 누구를 기다리듯 반듯하게 앉아있던 그 형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지고 휘청거렸지. 지금은 소파에 온전히 몸을 기대었어. 잠들었을지도 몰라. 오늘이 지나기 전에. 혹시 그 사람이 무심코 현관을 열고 꽃을 바라보기 전에. 목성은 그곳에 도착해야 했어. 할아버지가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거든. 웬만하면 만 송이의 장미들과 함께 목성이 찾아가 주었으면 한다고. 할아버지의 희끗한 표정이 떠올랐어. 생각할수록 배가 무거워졌지. 위산에 쇠뭉치라도 끓고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곧 죽을지 몰라. 젊음을 거부한 대가로 이제는 몸 조차 가누기 힘들지. 목성은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밀린 입술로 혼잣말을 내뱉었어.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나랑 계속 살지.”


백색 방은 재빨리 대답했어. 할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목성은 붉어진 눈으로 백색 벽을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어. 분쇄기 옆, 가루가 된 장미 잎이 흔들거리는 듯했지. 목성은 분쇄기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붉은 가루를 매만지며 말했어. “편지를 전하러 가자.”


백색 밀실은 대리석 타일 벽에 지도를 펼쳤어. 이곳 화훼 빌딩과 제법 가까운 거리야. 하지만 그 집은 개발제한구역 테두리 안에 있었지. 사회가 보듬어주지 않은 곳. 햇볕이 따갑고 벌레 먹은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한 곳 말이야. 목성은 그 훤히 들여다보이는 낡은 유리창 속 사람. 축 늘어진 채 술병을 집은 형체가 생각났어. 가끔 찾아갔던 멸종 보호원의 유리벽 속 짐승들 신세 같았지. 언젠가 그가 손바닥을 대었을 때, 다가와 유리창을 핥던 황소가 생각났어. 오늘. 목성은 분명 꿈을 꾸었지. 사람의 몸을 가진 황소가 제 커다란 눈망울을 치켜뜨고 목성과 대화를 나누었던 꿈. “지금 가야 할 텐데.”밀실이 그를 독촉했고, 목성은 고개를 흔들며 베이지색 재킷을 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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