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7 목성

말은 붉은 혀로 목성의 얼굴 앞 유리벽을 핥는 중이야.

by 류인환

개발제한구역 입구에서 차는 멈췄어. 규칙 상 더는 들어갈 수 없었지. 목성은 차를 돌려보낸 뒤 귓가에서 울리는 백색 밀실의 안내음에 따라 걸었어. 걸음마다 밟히는 잡풀은 목성의 하얀 구두를 감싸 안았어. 베이지색 슬랙스 아래 드러난 발목을 간지럽혔지. 밤중 더러운 풀이 맨살에 닿는 기분. 좋지 않았지. 목성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풀을 가지런히 짓밟았어. 구두를 흔들자 코팅 위로 붙은 진흙이 말끔히 털어나갔지. 주변을 둘러보았어. 달빛에 윤곽이 드러난 풀과 나무들. 그 사이로는 벌레들의 소리가 들렸지. 간간히 낯선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렸어. 문득 생각했어. 이 숲에 황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손목시계 불빛으로 바닥을 비춰 보았어. 수풀 저 멀리 낡은 콘크리트 지면이 드러났지. 그 위로 길을 안내하는 초록색 간판이 비스듬히 쓰러져있어. 개발제한구역. 글씨가 제법 고풍스러웠지. 그는 탁한 숲의 체취를 마시며 계속 걸어 나갔어. 저벅. 저벅. 제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어. 방치된 낡은 집 안의 그는 누구일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할아버지와는 어떤 사이일까. 그 누군가도 할아버지처럼 젊음을 거부한 노인일까. 할아버지는 어떤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그 집에 여러 명이 살고 있을지 몰라. 혹시 어머니와 아버지일까. 할아버지는 왜 지금에서야 그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일까. 그들은 왜 이 험한 곳에서 살고 있을까. 그들과 만나면, 편지만 전달하면 될까. 아니면 내가 받아들여야 할 어떤 감정적인 일들이 있을까.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어. 무심코 현관문을 밀고 들어갈 뻔했지!


이마에 땀이 맺혔어. 현관문 안쪽의 사람. 누구일까. 숨을 들이마신 후 눈을 질끈 감고 초인종을 눌렀어. 손끝에서 낯선 스프링의 반동이 느껴져.


탕-


금속 소리에 목성은 흠칫 놀랐어. 현관문 안쪽에선 어떤 움직임도 들리지 않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지. 이대로 영원히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편지는 문 앞에 두고 가면 돼. 손님과 인사가 필요한 거라면 영상을 띄어 보내면 그만이야. 할아버지는 왜 직접 편지를 전해주라고 말했을까. 돌아와서 편지를 직접 전해주지 못했다 말하면 실망할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명백한 끝맺음일까. 편지를 전하지 못하면, 할아버지와 나는 실망으로 결말짓는 것일까.


목성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또 한 번 눌렀어. 탕- 하는 소리는 마치 카우보이의 총소리와 같았지. 목성은 자신도 모르게 등을 돌렸어. 뚜벅. 뚜벅. 황급히 그 집을 떠났지.


끼익! 도망치는 그의 등을 향해 금속 문이 비명을 질렀어.


목성은 몸이 굳었어. 눈을 감았지. 또각. 또각. 뒤통수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와. 순간 목성의 감은 눈꺼풀에 환각이 보여!


낯선 거리. 어둠 속 두 개의 가로등. 그 아래 드러나는 거대한 주둥이. 거대한 범고래 한 마리가 느릿하게 아스팔트 지면을 기어와. 가로등 불빛은 젖은 고래의 몸통 외곽을 일식처럼 비추었지. 등허리의 숨구멍에선 하얀 숨결이 온천수처럼 새어 나오고 있어. 범고래는 주둥이를 벌렸어. 드러난 하얀 이빨. 그 사이 붉은 혀. 목성과 범고래 사이엔 유리벽이 생겼어. 범고래는 목성의 얼굴 만 한 붉은 혀로 유리벽을 핥는 중이야.




눈을 떴어.


현관문을 열고 선 젊은 여자가 보여! 붉은 파자마 위로 기다란 검은 코트를 걸쳤고 붉은 하이힐을 신었어. 머리카락은 검고 얼굴은 새하얗지. 그녀는 입술을 벌린 채 장미들을 바라보고 있어. 맞아. 그는 자신이 준비했던 만 송이의 장미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녀 치아는 새하얗고 입술은 장미처럼 붉어. 목성은 생각했어.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초라한 차림의 저 여자. 자신이 상상했던 그 누구도 아닐 것이라고. “휴-.” 쓸어내는 긴 한숨을 뱉고 목성은 손을 흔들었어


여자는 바닥에 깔린 장미들을 바라보다 별안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어. 그리고 눈을 감아. 꽃을 본 자신이 감동은 받았는지, 심장은 두근거리는지 확인하는 꼴이야. 목성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말을 걸기에는 몸짓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거든.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그녀가 꽃을 둘러봐. 입술은 굳게 닫았고 표정은 내려앉았어. 흠결 없는 품종으로 개량한 자신의 만 송이 장미를 보고도 감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으레 화훼 빌딩을 비난하는 사람들처럼 한번 보이고 버려지는 꽃의 생명에 별안간 슬퍼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 목성은 반감이 들었어. 오래전 판결이 떠올랐어. 몇몇의 회의론자들이 화훼 빌딩 폐기를 요청했을 때 사회는 분명히 말했어. 생명은 태초부터 다른 생명을 취하며 살아왔다. 꽃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고.


그가 생각에 빠진 동안 그녀의 시선은 한 곳에 오래 멈춰있었어. 목성도 얼른 그곳을 바라봤어. 붉은 장미들 사이 흰색 장미 하나가 드러났어! 그는 얼굴이 붉어졌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복제된 씨앗에서 흰 장미가 나올 리 없었지. 그들은 같은 존재이니까. 화훼 빌딩이 꽃을 잘못 골라낼 리도 없었어. 그녀는 흰 꽃이 무척이나 거슬렸는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지. 급기야 그곳까지 걸어가 백장미를 집었어. 눈을 지그시 감고 냄새를 맡았지. 목성은 해명할 준비를 했어. 저 꽃은 화훼 빌딩에서 나온 꽃이 아닐 것이다. 원한다면 드론에 찍힌 영상을 보여주겠다. 혹 실수로 흰색 꽃이 새어 나왔다면 책임을 지겠다. 어떤 배상을 원하는 것인가. 사회와 논의해보자. 아니면, 그녀는 붉은 장미들 속 우연한 흰 장미가 마음에 들었을지도 몰라. 저렇게 오랫동안 집고 있는 것을 보면 그쪽이 더 분명해 보였어. 표정에도 불편한 기색은 없어 보였지. 흰 장미 하나를 손에 가득 안은 그녀. 순수해 보여.




그녀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어.


목성은 얼굴이 붉어졌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어. 그녀는 그런 목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또각. 또각. 굽 소리를 내었지. 그녀의 뚜렷한 눈동자에, 목성의 미소가 사라졌어! 마치 목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녀의 완숙한 걸음 하나마다 바닥에 쓰러진 꽃들이 짓밟혀나갔지. 장미 하나가 짓밟혀 터질 때마다 목성의 심장도 서걱 쓸리는 기분이야. 어느새 그녀는 그의 얼굴 앞에 도착했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앳되었어. 스무 살 소녀처럼. 하지만 흠집 없는 피부 속 어딘가 짙은 연륜이 스며 나왔지. 까만 눈동자에 담긴 정제된 우울함. 그녀가 입술을 열어. 새하얀 치아가 드러났고 혀가 공기를 핥는 듯했지. 다만 그녀와 그 사이에 유리벽은 없었어.


“지금. 이곳에 있는 백만 개의 붉은 꽃과 한 개의 여자. 그중, 이 피맺힌 장미 하나만이 그녀야. 그녀를 찾아왔다면,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목성이 그 말의 의미라는 것도 생각할 틈 없이 그녀는 덥석 그의 손을 잡았지. 무척이나 뜨거웠어. 손가락에 전해진 지릿한 감각. 심장이 순간 사라져 버린 기분이야. 빈 공간으로 더운 공기가 호흡하듯 들어찼지. 그녀는 돌아섰어. 다시 꽃을 짓밟으며 돌아서는 그녀 뒷모습. 코트 위로 찰랑이는 검은 머릿결. 붉은 잠옷 바지 아래로 돋아난 하얀 발목. 닫히는 문. 요동치는 자물쇠 소리. 그리고 정적. 그는 손을 들추어보았어. 흰 장미에 붉은 피가 묻었지. 그래. 그녀가 피를 말했었어. 피맺힌 장미 하나만이 그녀이다. 목성은 알 수가 없었어. 알아낼 틈도 없었지. 그는 지금 사라진 심장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어.


“아… 편지. 편지를 전해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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