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8 황소

"나는 벽 안에 있어야 했네. 산채로 전시되어야 했지. 황소를 위해서.

by 류인환

목성의 꿈속. 이곳은 끝없이 펼쳐진 백색 공간.


높은 유리 장벽이 폭 2미터 즈음 간격을 두고 미로처럼 얽혔어. 공간을 가늠할 수 없어. 투명한 벽은 겹겹이 쌓여 외경을 늘어트려 놓았으니까. 지금 떠오른 태양. 햇살은 유리벽에 바스러져 미궁 곳곳 프리즘을 만들었지. 목성은 미궁 중앙에서 유리벽을 둘러보았어. 20 밀리미터 두께의 유리 두 겹이 맞대어 세워졌어. 틈 사이로는 미세한 공간이 있어. 그곳에 손톱만큼 거대한 체세포들이 떠다녀. 목성이 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던 광경처럼 말야. 세포들은 벗겨진 햇살을 받아 비눗방울처럼 오색찬란했어. 그들은 춤을 추며 서로를 잡아먹기도 했고, 분열해 서로를 만들어 내기도 했어.


목성이 유리벽에 손바닥을 얹자, 세포들이 격렬히 반응해! 그들은 순식간에 손바닥 주위로 모여들어 뭉쳐졌지. 균일한 층을 이룬 세포들은 유리벽 위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벽을 타고 흘러내렸지. 바닥에 떨어질 때 즈음엔 동물의 배아가 되었어! 검은 눈을 가진 투명한 생명체. 피부 속 혈관이 드러난 그들은 진득한 유기물 위로 미끄러지듯 몸을 비틀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해! 목성은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을 부딪혔지. 황급히 뒤를 돌아봤어. 등이 닿은 곳 또한 세포들이 원형으로 뭉쳐지고 있어.


겁에 질린 목성은 미로를 내달리기 시작했어! 겹겹이 쌓인 유리벽 너머 검은 출입구가 보여. 그곳으로

도망쳐야 했지. 하지만 미로를 헤쳐나갈수록 검은 문은 멀어져. 뒤를 돌아보았어. 저 멀리 벽에서 흘러나온 배아들은 어느새 인간이 되었어. 체액으로 젖은 검은 머릿결. 넓고 두꺼운 이마. 튀어나온 눈두덩이. 덥수룩한 수염. 두터운 허벅지 아래에는 다리 대신 두 개의 뱀이 달려 있어. 뱀 다리는 근육질 몸뚱이를 지탱할 수 없어서 양 팔로 기어 오는 중이야. 그들은 목성의 걸음을 주시하고 있어. 한참을 도망치고는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목성의 눈 앞.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황소 인간이 서 있어! 인간의 얇은 쇄골은 황소의 목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지. 황소는 커다란 눈망울로 유리를 내려다보며 물었어.


“당신은 신인가?”




목성은 대답했어. “나는 인간이다. 너는 황소인가?”

황소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주둥이를 열어 혀를 휘둘렀어. 마치 유리창을 핥으려는 듯이. “나는 황소다. 당신이 기억나. 동물원에서. 당신은 갇혀있었지.”

“갇혀 있는 건 너였어. 황소. 너는 멸종하기 직전이거든.”

“알고 있다. 나 역시 당신처럼 갇혀 있었다. 당신의 우리가 부러웠다. 싱싱한 풀. 당신은 그 달콤한 것을 가득 심어놓고도 먹지 않더군. 늘 그곳에 가고 싶었지. 하지만 내 우리를 벗어날 순 없다.”

“벽을 뚫고 나오긴 힘들지.”“그런 것이 아니야. 나는 벽 안에 있어야 했네. 산채로 전시되어야 했지. 황소를 위해서.”

“황소를 위해서?”“그렇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 있기에 황소는 살아 있는 것이다.”

“황소의 유전자는 멸종 보호원의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어. 식품공장에도 가득히 쌓여 있지. 네가 그곳을 지키지 않아도 황소는 보전돼.”

“그것들은 황소가 아니다. 당신들이 깔고 앉은 가죽 소파. 당신의 위 속에서 녹아내리는 고깃덩어리. 그것이 황소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다면 동물원에 당신이 갇혀있기 때문에 황소는 멸종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다. 나는 우리에서 몇 세대를 거쳐 살아가고 있네. 내가 죽어도 인간은 다시 황소를 복제해 살려놓을 것이야. 우리의 삶. 당신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네. 황소는 이렇게 생긴 것이라고. 뿔이 달린 짐승. 과거에 당신들에게 납치되어 노역했고, 당신들과 함께 문명을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으면 당신들은 잊을 것이야. 당신이 입고,

먹는 것이 황소라는 것이란 걸.”




황소는 코를 벌렁거리고는 주변을 돌아봤어. 주위로 뱀 다리를 한 거인들이 몰려들고 있었지. 황소는 다시 내달렸어. 별안간 꿈속 목성의 시야가 공중으로 올라갔어. 유리 미궁 전체가 드러났지! 빼곡한 미로 속을 헤매는 거인들이 보여. 하지만 황소는 보이지 않아. 목성은 한참 두리번거리다 황소를 찾았어. 황소는 유리창 속 평면에 담겨 있었지. 마치 화면 속 가상의 존재처럼. 3차원의 세계를 알아낼 수 없는 2차원의 미물처럼. 유리창 곳곳을 달리며 탈출구를 헤매고 있는 중이야.




Gigantes, Villadelcasale in Sic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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