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10 동행

그녀 얼굴이 또렷이 보일 때 말했어. “장미.”

by 류인환

그녀는 깊고 고른 숨을 뱉고 있어. 반대로 목성의 심장은 필름처럼 바스락거리는 중이야. 여자는 두 팔로 목성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어. 그를 거의 공중에 내동댕이쳤지. 나가떨어진 목성은 고통이 담긴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쓰린 팔꿈치를 감싸 안았어. 그녀에게 물어.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나요?"


“당신의 할아버지는 어디 있나요?”그녀는 어느새 우뚝 선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어. “할아버지는 병원에 있어요. 곧 죽을지도 몰라요. 어른이고, 젊음을 거부했거든요.” 말을 내뱉고 후회했어. 굳이 세세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지. 오히려 무척이나 궁금한 건 자신 쪽이었어.


“혹시 저희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무슨 관계인가요?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나이.” 그녀는 오른쪽 허공으로 고개를 돌리며 골똘히 생각했어.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몇 살인가요?”


“글쎄요, 몇 살이라고 했지?” 목성의 시계는 대답하지 않았어. 대신 끊임없이 빛을 낼 뿐. 고장 난 것일까. 맞아, 아까 저 여자가 손목을 세게 잡았을 때 부서진 게 분명해.


“병원으로 가요.” 그녀의 말에 목성은 대답했어. “이 정도 상처는 집에서도 치료할 수 있어요. 걱정 말아요.”

“아니요, 당신 할아버지가 있는 병원이요.” “아… 병원으로 가도 할아버지는 대답해줄 수 없어요. 혼수상태거든요.”“병원으로 가요. 또 맞기 싫으면.” 그녀는 표정 없이 가녀린 손목을 쥐어 보였어.


목성은 얼굴이 욱신거렸지. 누가 그녀에게 사람을 이렇게도 쉽게 때려서는 안 된다고 일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게다가 그녀는 실제로 목성을 때려죽일 수 있을 것 같았지. 지금은 시계마저 고장 났잖아. 그 전능한 사회도 당장 자신을 구해줄 수 없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와 함께 있어야 했어. 물어볼 것이 많았거든.

“그럼, 병원으로 가 볼까요.”


“네” 여자는 짧은 대답을 하고 내리막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어. 목성은 뺨에 한 손을 대고는 앞장섰어. 시계 불빛으로 암흑을 걷어냈지. 서걱- 풀밭을 걷는 그의 걸음 뒤로 또각 또각 하는 그녀 발걸음이 이어졌어.




목성은 오늘 일어난 일을 곱씹었어.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기 전에 꽃 주문을 부탁했지. 꽃과 함께 편지를 전해주라고. 그 이름 모를 여자에게. 아니, 할아버지는 주소만 알려주었어. 어쩌면 주소가 잘못되었을지 몰라. 아니면 그 집. 그녀의 것이 아닌지도 몰라. 집안에는 그을음이 가득했거든. 오래전 불에 타버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집에 몰래 들어온 여자인지도 모르지. 목성이 그녀에게 물었어.


“혹시 이름이 뭔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어. 독백을 읊조린 느낌이었지. 지금 그녀는 분명 목성 뒤를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어. 굽에 바스러지는 마른 흙바닥 소리가 들리니까. 그는 작게 내뱉었어. “왜 이 산속에서 힐을 신고 다니는 거야. 미친 여자도 아니고.”


“다 들려요!” 그녀는 목성 뒤통수에 대고 외쳤지. 어림잡아 10미터 즘 간격을 두고 따라오고 있어. 목성은 완전히

뒤를 내보였어. 무방비 상태야. 그녀 모든 것이 수상해. 15분쯤 걸어 내려왔을 때 드디어 차로가 보여. 이제부터는 차를 타고 가면 돼. 그때 뒤통수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이름 지어주실래요?”


목성은 허공을 바라보며 외쳤어. “네? 이름 없어요?”그녀는 또 대답이 없어. 목성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지. 차도에서부터 비춰오는 불빛에 그녀의 모습이 환히 드러났어. 흙투성이의 초췌한 코트를 걸쳐 입은 여자. 그녀는 마치 고라니처럼 대낮 같은 차로를 두리번거리고 있어. 이런 걸 처음 보는 모양이야. 가늠해보았지. 밤마다 은은한 백색 빛을 내뿜는 미생물 도료로 칠한 이곳 차로는 자신이 태어난 해에 생겼다고 들었어. 그 얘기는 그녀가 자신보다 어리거나, 또래라는 말이야.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지.


목성은 검은 숲으로부터 빛의 도로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앳된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어. 그녀와의 거리가 1미터 즘 되었을 때. 그래서 그녀 얼굴이 또렷이 보일 때 말했어.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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