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위해 강도를 막아줄 수 있겠니? 사랑한단다 얘야.”
곧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쳤어. ‘실패한 년! 네 냄새나는 꼴을 여기서도 봐야 한다니.’
딸의 머릿속 그녀들은 모두 목소리가 같아. 하지만 구분할 수 있어. 방금 욕지거리를 내뱉은 여자는 자신의 앞에서 술을 들이켜는 실패작.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아챘어. 딸은 자신도 모르게 자동응답기처럼 말해버렸지.“실패한 년.”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을 쳐다봤어.“하!” 뱉어내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짓이겨진 미소를 지었지. “나 구나, 그 말투는.” 고개 돌려 술병에 붙여진 라벨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을 이었어. “내가. 스스로가 밉고 싫어서. 일찍 너를 낳았는데. 네 속에 담긴 나조차 나를 싫어하는구나.”
장시간의 침묵 후 어머니는 딸을 다시 골똘히 쳐다보며 말해. “있잖아. 지금 너. 너에겐 영혼이랄 것도 없는 것 알고 있단다. 그저 복제된 젊은 몸뚱이에 지나지 않지. 그래도 지금 내 모습은 기억할 거란다. 숙녀가 되어서도 말이야. 얘야. 난 이겨내지 못했어. 머릿속 그 수많은 어머니들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언젠가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그래서 세상에 나 혼자가 되었을 때 말이야. 너무나 외로웠단다. 그녀들의 목적 따위 알게 뭐야. 백만 송이 장미를 들고 올 그 남자를 기다린다고? 내 몸뚱이로 뭘 하겠어. 휘어진 다리를 봐! 내게는 그 남자가 필요 없어. 너도 필요 없어. 나는 니 깡통 속에 담긴 엄마를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야. 엄마, 듣고 있어?”
어머니는 별안간 욕조를 향해 술병을 던졌어! 그리고 일어섰지. 술에 취한 그녀는 몸이 기울었어. 진홍색 잠옷 바지가 살짝 흘러내린 바람에 옷감에 발이 엉켰어. 젖은 욕탕 타일 바닥으로 미끄러진 그녀 몸뚱이 아래에는 깨진 술병 파편이 남아 있어. "악!" 그녀는 비명을 질렀어. 유리가 박힌 손바닥으로 바지춤을 허겁지겁 집어 올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절뚝거리며 욕조로 기어갔지. 그리고 상체를 액체 속에 푹 담그고는 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어!
“어머니, 엄마! 거기 있어? 내 목소리 들려? 나 좀 봐. 아무 말이나 해봐. 왜 나를 버렸어! 그럴 거면 왜 나를 살렸어! 할머니들. 들려?”
그녀는 입안에 고인 침과 술을 딸에게 내뱉으며 울부짖었어. 딸은 머릿속 터져 나오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졌어. ‘저 년이 미쳤나!’ ‘우리 아기 불쌍해서 어떡해. 나 여기 있단다. 얘야 어서 전해줘.’ ‘저러다 새 아기에게 해를 입히면 어째.’ ‘진작 태웠어야지. 저런 것.’
가장 분노한 여자는 어머니였어. ‘저 한심한 년이 나라니. 딸을 낳자마자 죽어버리기로 했잖아!’ 말소리가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들도 들렸어. ‘어부부-‘ ‘우흐흐르- 끄도’ 의식이 희미해진, 오래된 할머니들은 그런 외침 밖에 할 수가 없었어. 어쩌면 그중엔 마리나도 있을지 모르지.
그때! 이곳. 지하의 거대한 욕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어. 검은 헬멧을 쓴 사내가 나타났어. 권총을 들고 있었지! 그 남자는 전자장비로 가득한 이 방을 두리번거렸어. 딸의 머릿속에서 그녀들의 다급한 외침이 쏟아졌어! ‘강도야! 강도!’ ’아직 우리는 죽으면 안 돼!’ ‘진실한 사랑!’ ‘그 남자랑 약속했단 말이야!’ ‘저 년만 죽여.’ ‘얘야. 아가야. 수조 속에 몸을 숨기렴.’ ‘저 년은 안 막고 뭐해! 절름발이 년!’
딸은 어머니에게 다급히 말했어. “엄마를 위해 강도를 막아줄 수 있겠니? 사랑한단다 얘야.”어머니의 동공이 흔들렸어. 딸은 기억 속 어머니들의 인자한 미소를 떠올리며 따라 해 보았지. 어머니는 한동안 그녀 눈동자와 입꼬리를 바라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딸에게 말했지. “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강도에게 달려들었어. 남자는 밀쳐내려 했지만 그녀는 빠른 속도로 그 남자 팔을 낚아챘어. 남자는 손아귀의 압력에 당황했어. 손목이 꺾여버렸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치는 그를 향해 어머니는 손톱을 드러내곤 강도가 쓴 헬멧을 힘껏 할퀴었어. 보안경은 마치 유리창처럼 쉽게 부서졌어. 파편이 그의 눈을 찔러댔어. 남자는 쓰러졌어. 어머니는 몸을 던져 그의 허리춤까지 다급하게 기어갔지. 그리고 두 손을 깍지껴 헬멧을 내리쳤어. 쾅. 쾅. 굉음과 함께 헬멧은 금이 갔어. 남자는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방아쇠를 당겼어.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렸고, 둔탁한 몸의 부딪힘이 들려오다, 이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딸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어. 어머니와 강도 모두 죽었어. 어머니는 강도가 쓰고 있는, 바스러진 헬멧을 꼭 안은 채 그를 덮고 있었지. 연기 냄새가 나. 목욕탕 저편 전자장비에서 불길이 일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담긴 철제 욕조는 자동으로 덮개를 닫았어. 그녀는 다시 인큐베이터에 갇혀버렸지.
소파를 벗어난 그녀는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끝없이 내려왔어. 자신과 어머니들이 태어난 그곳으로. 지하실 거대한 목욕탕과 가까워질수록 계단에 덮인 잿더미가 두터워졌어.
후-.
그녀의 입김에 문고리에 묻은 먼지들이 덜어져.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어. 머리채를 잡힌 짐승처럼 철제문은 삐그덕 하는 비명을 질렀지. 완전히 철문이 젖혀지고 나서도 날 선 소리는 한동안 욕탕을 휘둘러 그녀 살갗으로 스며들었어.
그녀는 정면을 응시한 채 침을 꼴깍 삼켜. 회색 재로 일렁이는 거대한 공간. 계단 벽에서 밀려오는 미색 조명등에 의지해 걸음을 짚었어. 하얀 맨 발바닥에 수년 전 그을음이 가득 묻었지. 그녀는 목욕탕 중앙. 거대한 철제 욕조 앞에 섰어. 틈 사이로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힘껏 잡아당겼지. 욕조는 힘없이 벌어졌어. 욕실 구석, 오래전 타버린 시신 한구를 안아 들고는 인큐베이터에 눕혀.
딸은 어머니를 보며 말했어.
“엄마. 나 오늘 엄마들이 기다리던 그 남자를 봤어. 정말 많은 장미를 가지고 왔더라. 말했던 것처럼 아름답고 듬직해 보이는 남자야. 근데, 있잖아. 나는 그 남자에게 어떤 감정도 없어. 어쩌면 그 진실한 사랑이란 게, 엄마와 엄마들을 거치는 동안 옅어졌나 봐. 나는 그 남자와 내 남은 삶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 미안해. 그동안 수많은 엄마들이 그를 기다리며 죽고 태어났는데. 대신 피를 좀 줬어. 엄마들의 피. 그것이 지금 엄마들의 전부잖아. 그걸로 만족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벨벳 잠옷 주머니에서 휘발유가 든 병 하나를 꺼내 욕조 위로 부었지. 반대편 바지 주머니에서는 낡은 플라스틱 불쏘시개를 꺼내 불을 붙였어. 욕조 내부의 조작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그러지기 시작했어. 그녀의 앳된 볼이 붉어졌어. 등 돌리고 지하실을 떠났어.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어. 남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휴. 짧은 한숨을 지었지. 그때.
탕-. 다시 초인종이 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