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3 모계

복제된 그녀들은 꼭 이전의 복제품을 ‘어머니’라 불러야 한다.

by 류인환

그녀가 태어나던 날. 어머니가 말했었어. “너는 나란다.”


딸은, 눈꺼풀을 열어보기도 전에 알아챘지.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걸. 탄생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눈을 뜨자 백색 석면 천장이 보여. 그 아래 형광등을 받아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어머니를 확인했을 때는 확신했지. 갑자기 생겨난 기억과 의식. 꿈도 상상도 아닌 현실이라는 걸. 어머니의 동공에 비친 물체를 보았어. 어머니와 같은 얼굴. 머릿결. 피부색을 가진 그것은 자신이었지.


딸은 어머니의 말을 곱씹어보았어. ‘너는 나란다.' 사실이야. 자신에게 주입된 기억은 모두 어머니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로 ‘나는 너란다’ 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그것도 사실이야. 어머니는 이제 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어. 그녀와 어머니는 지금부터 개별적인 몸을 가진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딸은 진득한 액체가 가득 담긴 금속 수조에 담긴채 가늠했어. 자신의 몸은 한 달 전 그 유백색 액체들의 응고물이다. 자신의 기억은 욕조 저편 거대한 전자장비에 담긴 마리나의 원본에서 기원했고, 자신을 만들어낸 구형 복제품의 복사본이다. 기억 속 마리나의 지침에 따르면, 현재 자신은 스무 살 정도의 소녀의 몸이며, 지금부터 일 년 간,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머니는 그녀가 세상에 적응할 때까지 모든 헌신을 쏟아야 한다. 어머니. 즉 마리나의 복제품이 다음 세대의 복제품을 만든 이유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 그래서 다음 복제품에게 바통을 넘기는 행위로 지금 자신을 만들어냈다. 복제된 그녀들은 꼭 이전의 복제품을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데 그녀들의 이름은 샛별. 비너스를 뜻했지.




어머니는 헤벌쭉한 입꼬리로 그녀를 바라봤어. 손을 조심스레 수조 안에 담갔지. 딸은 게슴츠레 눈을 돌려 어머니의 젊은 손을 보았어. 의문이 들었어. 왜 굳이 지금 자신을 만들었을까. 자신이 대체하기에는 어머니 역시 젊지 않은가. 딸이 가늠하기에 어머니는 영락없는 숙녀였으니까.


그때, 누군가의 대답이 들려왔어!

‘그 사람을 만나 오랫동안 살아가려면 조금이라도 더 젊은것이 좋지 않니. 그 남자와 함께 살면 더는 환생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머니의 목소리야! 하지만 눈앞의 어머니가 아니야.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방금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환청처럼 울렸어. 딸의 머릿속에 어머니가 살아 있어! 혼란스러웠지. 눈앞의 어머니를 찬찬히 훑어보았어. 무적이나 피곤해 보여. 눈과 입 주변 피부는 부르텄고 산발한 머릿결은 기름졌어. 눈가엔 오래된 화장이 말라 번졌고 치아는 싯누렇게 물들어 있었어.


딸은 생각했어. 저 복제품은 실패작이다. 그래서 자신을 서둘러 만들었다고. 마리나는 분명히 말했어. 혹시라도 복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소각해야 한다고. 그 남자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늘 아름다운 단 한 명의 여자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지침을 내렸어. 마리나는 그녀들을 만들어낸 원초적인 어머니 또는 여신이기에 따라야만 하지.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었으니까. 그녀는 딸을 수조 바깥으로 일으키려다 지쳤는지 이곳 거대한 목욕탕 구석으로 기어갔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지. 술병을 들어 몇 모금 마셨어. 그녀 주변에 빈 술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어. 딸의 시야가 술병에 머물자, 어머니는 얼른 입안에 고인 술을 욕실 바닥에 뱉고는 물 끓는 목소리로 말해.


“태어나자마자, 몸을 부린다는 게 쉽지 않지.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단다. 너의 할머니가 그러셨어. 나는 남들보다 늦게 일어섰다고. 무려 7년이 걸렸지.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참 고생했다고 늘 투덜댔었어. 나는 다리가 병신으로 태어났거든. 호호호”


그녀는 아이처럼 헤벌쭉한 입을 반쯤 가린 채 웃었어. 손가락 사이로 알코올 가득한 침이 새어 나왔지. 곧 딸의 머릿속 누군가가 속삭였어!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런 적 없단다. 사랑스러운 아가야. 술은 또 왜 그렇게나 마시니. 몸 상해. 엄마는 너를 무척이나 보고 싶었단다.’


다른 누군가가 또 속삭였어. ‘쟤는 또 왜 저 모양 저 꼴 이래.’




수많은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딸의 머릿속을 휘감았어. 딸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 술병을 든 어머니는 딸의 표정을 보고 픽- 하고 웃었어. 한 모금 더 마시곤 높고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지.


“아직 의식이 정돈되지 않았구나. 걱정 말거라 얘야. 네가 스무 살이 지날 무렵엔 더는 들리지 않을 테니. 우리들과 너는 언젠가 너 하나가 될 거야. 당분간은 할머니들에게 많은 얘기 들으며 지내. 네가 숙녀가 될 때까지 돌봐주실 거야. 같이 할머니들과 지내자. 날 소각하지 말아 줘. 그 남자가 올 때까지 만이라도 말이야. 나는 어머니들이 참 그립단다. 어머니 얘기들 내게 전해줘.”


어머니는 자애로운 웃음을 한번 보인 뒤 문득 고개를 돌렸어.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지. 그러다 갑작스레 초초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깨문 채로 딸에게 물었어. “혹시 거기. 네 머릿속에 나도 있니?”



이전 02화백만송이 장미 2 백만송이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