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낡은 목조 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윽 젖혀졌을 때. 벌어진 틈 안으로는 어둠뿐.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탕-
지릿한 소리와 함께 집 밖 가로등이 켜졌어. 지금은 한 밤. 뒤늦은 노을 같은 등불은 비와 바람이 오랜 시간 매만진 유리창을 비추었어. 마른 빗물 반점이 맺힌 주황색 빛은 거실을 넘어 침실 문을 두드렸지. 빛의 집념 때문인지 목조 문은 더욱 벌어졌어. 그 바람에 침실 안이 드러났고. 그녀는 잠옷을 입던 중이야. 붉은색 벨벳 파자마.
갑작스레 열린 침실 문과 밀려드는 빛을 보는 중이야.
손가락이 멈췄어. 쇄골에 비스듬히 걸친 옷깃을 집은 그대로. 거실 너머를 살펴보려 고개를 기울이자 동공에 가로등 빛이 세로 선으로 맺혀. 눈살을 찌푸렸어. 동시에 한쪽 입꼬리가 당겨지고 입술 위에 박힌 동그란 점도 솟아올라. 실내에는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어. 조금 전 샤워를 마친 욕실. 수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려. 주방에선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는 냉장고 울음이 들리고 바깥 먼 곳 벌레들의 날갯짓이 들려. 그뿐이야. 아무도 없어.
휴-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휘파람 불듯 짧은 한숨을 뱉었어. 단추를 마저 잠갔지. 진득한 걸음으로 침실을 나와 거실 중앙에 놓인 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어. 침실 문을 바라봐. 누가 문을 열었을까.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지. 문은 종종 제 무게를 못 견뎌했으니까. 요란한 장식이 새겨진 흑갈색의 때 묻은 목조 문. 전혀 방문 같지 않아. 오래된 집의 현관을 떼어다 놓은 것 같았지.
문의 장식을 위로부터 아래로 훑어보면 태양의 불길을 머릿결 삼은 여자, 초승달을 목에 건 남자 얼굴이 나란히 걸려 있어. 남녀 주위를 맴도는 날개 달린 천사들은 망원경으로 거대한 빌딩을 내려다보는 중이야.
건물 내부. 빼곡히 박힌 정육면체의 방 내부에는 괴물들이 사투를 벌여. 뱀의 다리를 가진 남자. 미간에 눈이 달린 거인. 황소 머리를 한 소년. 허리춤에 지느러미를 두른 소녀. 넘실대는 뱀을 머리에 두른 여자. 그런 것들이 입방체에 하나씩 머물고 있었지. 빌딩 아래. 지상에선 사람들이 그들의 싸움을 올려다보는 중이야. 술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마치 화랑의 작품을 대하듯 근엄한 손짓으로 입방체를 가리키고 있어. 반면 건물 뒤편, 긴 그림자에 숨은 누군가는 고장 난 괴물을 황급히 고치는 중이야. 조개무덤처럼 널브러진 팔다리를 꺼내 이곳저곳 맞춰 보며 시계를 주시해. 마지막으로 건물 지하. 동물의 머리가 전시되어 있어. 소와 말. 고래와 바다표범 같은 것들이 빼곡히 박혀있어. 목조 문 위로부터 아래. 그 모든 형상은 지금, 달처럼 옅은 가로등 빛에 제 존재를 드러내려 애쓰고 있어.
그녀가 고개를 짧게 흔들었어.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릿결이 흔들거렸지. 숨을 크게 마시고 허리를 곧게 폈어. 허벅지를 쓸어내린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었지. 소파에 몸을 밀착했어. 벨벳 잠옷과 등허리 살결 이 마주 닿을 만큼. 그녀는 턱을 당겨 뒷목을 꼿꼿이 세우고는 정면의 현관문을 응시했어.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녀는 풀어졌어. 뻗은 손이 걸친 커피 테이블 위로는 반쯤 빈 위스키 한 병이 놓여있었지. 주변에 잔 같은 건 없어. 현관을 주시한 채 손가락을 휘저어 술병을 잡아. 한 모금 들이켜고 다시 테이블에 올려두었지. 나른해진 그녀 상반신이 미끄러져 내려갔어. 머리카락은 소파 등받이에 두텁게 걸쳐있어.
현관 왼쪽. 거실 벽에 거대한 액자 하나가 걸려 있어. 마침 가로등과 유리창 만들어 낸 점박이 사각 빛 막이 우연처럼 액자를 덮었어. 그림 속 주인공이 가려졌지. 빗물 반점의 모자이크로. 그녀는 입 안에 고인 술을 곱씹으며 액자를 보는 중이야.
그때. 액자에 담긴 유리창 그림자에 검은 형체가 스쳐 지나갔어! 그녀는 눈을 크게 떴어. 숨도 잠깐 멈췄지.
탕-
초인종이 울렸어. 입안의 술을 얼른 혀로 휘감아 꿀꺽 삼켜. 탕. 탕. 초인종의 멎은 울림이 잔상처럼 깜빡이며 실내를 돌아다니고 있어. 그녀 심장 역시 점멸등처럼 깜빡여. 머뭇거리는 동안 현관문의 녹슨 쇠뭉치는 덤벼드는 황소처럼 몸을 공중에 한껏 띄었다가, 제 머리가 부서져라 구리 종을 한번 더 들이박았어.
탕-
먼지 자욱한 쇳소리는 거실 허공을 빠르게 훑고 사라졌어. 집안 곳곳의 윤곽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온몸으로 그 누군가의 부름에 메아리쳤지. 탕. 탕. 금속음은 환청처럼 끝없이 그녀 머릿속을 울리며 독촉해. 다급히 몸을 일으켰어. 하얀 맨발 옆 덩그러니 놓인 붉은 하이힐을 구겨 신고. 소파 위에 널브러진 검은 코트를 걸쳤어. 허리춤에 달린 모직 벨트로 단단히 몸을 잠그고는 현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해.
또각 또각.
현관 문고리를 가파르게 쥐었어.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지. 문이 잘 열리지 않아. 바닥에 무언가 걸려있었지. 현관문 아래 웬 장미들이 끼어 있어. 짓이겨진 꽃잎을 바라보는 그녀. 입술은 벌어지고 동공은 흔들거렸지. 두 손으로 얼굴을 한껏 쓸어내렸어. 붉은 립스틱이 늘어지게 묻은 하얀 손바닥. 여전히 떨고 있어.
숨을 들이마신 뒤 현관문을 힘껏 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