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 밤. 어둑한 정원. 수많은 장미들이 현관 앞에 흩뿌려져 있어.
초봄. 밤. 어둑한 정원. 수많은 장미들이 현관 바닥에 흩뿌려져 있어.
고개 들어 꽃잎이 넘실대는 붉은 바다를 봤어. 멀리, 손 흔드는 남자가 보여!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를 한참 바라보다, 손을 가슴에 대고 눈 감았어. 떨리던 손이 편안해질 때, 찬찬히 추위에 떠는 붉은 장미들을 훑어보았어. 마치 하나하나가 숨 쉬는 존재라는 듯. 그중, 붉은 꽃에 둘러싸인 백장미 하나가 보여. “하나의 장미.” 그녀가 읊조렸어. 결심한 듯 그곳으로 걸어가.
또각 또각.
걸음마다 하이힐은 눕혀진 붉은 꽃의 몸을 관통했어. 서걱. 서걱. 질러대는 꽃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지. 몸을 숙여 백장미를 집어 들어. 일몰처럼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고는 한껏 꽃의 체취를 마셨어. 저편에 서 있는 그의 존재는 잊어버린 듯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눈을 떴어! 짙은 눈꺼풀이 열리고 닫히는 동작은 꽃이 피고 지는 듯 묵직해. 그녀는 별안간 꽃봉오리 아래 날 선 암녹색 가시를 쥐었어! 고통은 붉은 입술 밖으로 새지 않아. 다만 손아귀 사이로 선홍색 피가 흘러. 팔을 허리춤 아래로 내리자, 백장미는 미끄러지는 선혈을 머금은 붉은 장미가 되었지. 바닥에 널브러진 붉은 장미들보다 더욱 붉은.
또각 또각.
걸음마다, 정성스레 눕혀 둔 장미들은 찢어지고 쓸렸어. 남자는 그의 눈과 피부를 통해 꽃의 고통을 느끼는 중이야. 어느새 다가온 그녀는 피로 흠뻑 적신 백장미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고 말했지. “지금. 이곳에 있는 백만 개의 붉은 꽃과 한 개의 여자. 그중, 이 피맺힌 장미 하나만이 그녀야. 그녀를 찾아왔다면,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이렇다 할 표정 없이 핏방울 떨어지는 장미를 건네는 그녀. 그는 황소 같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야.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들고 꽃을 쥐어주었어. 그래서 그의 손아귀에는 이 붉은 바다에서 가장 붉은 장미 하나. 그리고 그녀의 피 몇 방울이 쥐어졌지. 그녀는 뒤돌아 집으로 들어갔어.
철컹.
문이 잠기고 창가 블라인드가 닫혔어. 아직은 추운 밤. 그는 이미 죽은 몇몇의 꽃과 길거리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천 개의 꽃. 그리고 그녀라 할 수 있는, 손에 쥔 꽃 하나와 함께 남겨져버렸어.
그녀는 현관문을 잠근 후 창문 밖 남자를 지켜보았어.
가로등 불빛 아래 여전히 검은 형체로 서 있어. 블라인드를 내렸어. 텁- 하는 소리만큼 탁한 먼지들이 창가 위로 일렁거려. 블라인드 결 사이로 기어코 넘어오는 가로등 빛에 먼지 입자는 날 선 유리 가루처럼 번뜩이는 중이야. 들이차는 숨 구멍을 긁는 듯 아직도 입술이 떨려. 아무튼 이제 그는 보이지 않아.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소파에 앉아 몸을 한껏 배배 꼬고는 기지개를 길게 켰지. 여전히 밀려드는 꽃의 체취. 벗지 않은 붉은 하이힐을 보았어. 기다란 굽은 붉은 장미 한 봉오리를 관통한 채 붙들고 있었지. 구두를 벗어 마루 바닥에 던져놓았어. 드러난 작은 발은 새것처럼 희고 젊어. 반대로 그녀를 둘러싼 가구와 잡기들은 모두 늙었어.
고광택의 붉은 구두가 눕혀진 흑갈색 원목 마루.
그녀 발걸음마다 삐걱- 소리를 내곤 했지. 낡은 판재들은 매번 욕실에서 불어오는 증기 가득한 노랫소리를 머금어 비틀리고 벌어졌어. 벽지가 뜯겨나간 거실 콘크리트 벽에는 그을음과 이끼가 뒤섞였어. 진회색 벽을 가득히 메운 검은 농담과 진녹색 압점은 여러 형상을 만들었지. 두 팔을 펼치고 달려오는 여자. 폭발하는 화산. 무릎을 굽히고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칼을 겨누는 무사. 태양을 움켜쥐려는 거인. 털을 곤두세운 채 몸을 웅크린 고양이.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거대한 눈동자 같은 것들이 보여. 시간의 퇴적이 만든 깊은 벽화의 중점. 집안 유일한 장식품이 있어. 그녀가 매일 저녁 소파에 앉아 바라보는 것 말야.
고딕 풍의 살찐 덩굴무늬가 새겨진 폭 1미터의 금장 액자. 붉은 잠옷을 입은 그녀 전신사진이 담겨있어. 액자가 없었다면, 누구도 집의 주인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 늙은 집과 달리 스무 살을 갓 넘겼을 정도로 앳되었으니까.
커피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 병을 다시 집었어. 남은 술을 입술 안으로 벌컥벌컥 털어 넣었지. 볼을 한껏 부풀린 채 반 모금을 남겨 손바닥을 펼쳤어. 방금 전, 장미 가시가 긁어놓은 빽빽하고 세밀한 상처. 진득하게 마른 핏덩이는 자잘한 열매처럼 매달렸어. 손바닥을 턱 아래로 모으고 술을 뱉었지. 동그랗게 말아 올린 입술에서 흐르는 금빛 술은 피를 끓여내듯 뒤섞었지. 가는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붉고 샛노란 액체. 마른 원목 마루가 흔적 없이 들이켰어.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어. 손금처럼 세밀히 그어진 선은 매 분마다 엷어지다가, 곧 흔적 없이 아물었어! 금세 말라버린 손바닥을 붉은 혀로 길게 핥았어. 입술을 잠그고 혀를 휘감았지. 피를 맛보려는 듯 말야. 소파 팔걸이에 손바닥을 슬쩍 닦아내고는, 지하실을 향해 걸어갔어.
그녀가 떠난 검은 소파. 여전히 그녀 흔적이 남아있어. 희고 부드러운 그녀 살갗이 질긴 소가죽 표면을 긁어놓았거든. 허옇게 헤집어져 뜯겨나간 부위에는 그녀의 뒷목, 어깨, 등허리, 허벅지까지 고스란히 그녀의 몸짓과 행위가 새겨있어. 지금의 앳된 몸보다 훨씬 오래된 그녀의 흔적. 마치 유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