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15 사회

문득 백색 밀실이 떠올라. 수조에 담겨 증기를 내뿜는 젖은 장미 다발.

by 류인환

지금은 새벽 2시. 수전에서 흐르는 따뜻한 물살에 목성은 금세 나른해져. 여전히 욱신거리는 팔꿈치와 얼굴의 고통. 그리고 장미가 아니었다면 욕실 벽에 기대어 잠들어버렸을지 몰라. 무척 피곤한 하루였으니까. 장미도 샤워를 하고 있을 거야. 목성은 눈을 감고 떠올렸어. 낯선 이곳을 헤매다 샤워실에 도착해 몸을 씻는 그녀 모습을. 하얀 얼굴만큼 빛나는 피부를 가졌을 거야. 예의 그 이상하지만 순수한 웃음으로 따뜻한 물줄기를 받아내겠지.


문득 백색 밀실이 떠올라.

수조에 담겨 증기를 내뿜는 젖은 장미 다발.


그리고 가끔 상상했던 것. 수조 속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여자.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장미처럼. 우연이 아니야. 할아버지가 다시 떠올랐어. 어쩌면 장미는 할아버지가 이어준 자신의 인연일지 몰라. 목성은 지금 자신의 불그스름한 뺨의 열기가 창조에 대한 욕망인지, 그녀에 대한 애정인지 알 수가 없었어. 할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있어. 인간은 믿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어떤 확신이 들었을 때, 반대로 가장 생각하기 싫은 것을 떠올려 두라고.

목성은 바라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았지. 할아버지가 장미를 빼앗아간다. 혹은 장미가 목성을 이용해 할아버지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 어쩌면 사회가 갑자기 나타나 장미를 제거할지도 몰라.


자신도 형벌을 받을지 모르지. 사회는 일관성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몸짓을 조심하곤 했어. 젊음을 뺏기지 않으려고. 만약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목성은 감흥이 없었어. 그에게 유일했던 할아버지 역시 곧 사라질 거야. 혼자 남게 되겠지. 다만, 장미. 만약 장미와 함께 살게 된다면 영생에 의미가 있을까.


목성은 서둘러 샤워실을 나왔어.


응급실로 곧장 향했지. 온기가 담긴 철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어. 곧 기계의 손이 목성의 팔과 얼굴을 휘감았지.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힌 욱신거림이 사라졌어. 거울을 봤어. 얼굴의 붓기가 가라앉고 뺨 주위로 얇은 투명 막이 덮여 있었지. 곧 피부가 되어서 예전과 다름없는 살결로 돌아갈 거야. 어서 멀쩡한 얼굴로 장미를 마주하고 싶었지. 말끔하게 다려진 옷을 입고 장미를 찾아 나섰을 때.


‘-‘


별안간 건물 전체에서 이명 같은 기계음이 들렸어!

병원 전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듯 해!


목성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어. 병원의 작고 큰 기계들이 멈춰 서있어.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곧 조명이 깜박거리기 시작해.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 할아버지! 목성은 얼른 회복실로 달려갔어. 문이 잠겨있어. 목성은 힘껏 문을 두드렸어.


“할아버지! 누구 없나요, 여기 문 좀 열어줘요!” 백발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는 목성을 힐끔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출구를 향해 달려갔어. 그때 응급실 문이 덜컥거리기 시작해. 곧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뜯겨 나갔지. 철제 미닫이 문을 짓이겨놓은 손가락이 보여. 장미의 손이야!


목성은 서둘러 침상에 누운 할아버지의 어깨를 붙잡았어. “할아버지!” 어떤 움직임도 없었지. 상태를 알 수 없어. 모든 기계가 작동을 멈췄으니까. 투명한 화면에선 놀란 눈을 한 목성의 얼굴만 흐릿하게 비칠 뿐이야. “할아버지는 살아 있었어요. 그런데….” 장미는 태연하게 침상 옆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말하고 있어. 목성은 장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어. 비상 조명에 간신히 그녀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지.


목성은 화가 솟구쳤어. “당신 짓이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나를 보았을 뿐이에요. 그뿐이에요.” “할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고!”


‘-‘


그 순간 거대한 기계음이 한번 더 울려!

마치 고대의 나팔소리 같았지.


건물 안 조명이 일순간 다시 켜졌어. 목성은 잠깐 눈 멎었어. 침상 옆에 놓인 화면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해. 얼른 화면을 붙잡았지. 유리(劉璃) 1982년생 재생 불능. 목성은 장미에게 울부짖었어. “살려내!” 장미는 여전히 다소곳이 앉아 있었지. 마치 인형처럼. 목성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모습에 머릿결이 하얗게 새어버리는 것 같았지.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와. 걷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 침상에 누운 환자들만 두터운 유리관에 갇혀 있을 뿐이야.


장미 옆에 세워진 기계 팔이 별안간 좌우로 흔들거리기 시작했어. 마치 시계추처럼. 목성과 장미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 기계는 그와 그녀를 번갈아 가리키며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다가.


장미의 심장을 관통했어.


장미는 넊 나간 표정으로 목성을 바라봐.


정말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 머문 숨결과 함께 빠져나갈 듯 해. 장미는 꼿꼿이 등을 세우고 자신의 가슴에 솟아난 철심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어. 곧 힘없이 고꾸라졌지. 목성이 느끼기에 그 순간은 영원처럼 느렸어. 장미의 찡그린 눈꺼풀. 요동치는 머릿결. 뒤로 늘어지는 목덜미와 쇄골의 경련 하나까지 눈에 들어찼으니까. 피로. 졸음. 분노. 의심. 그런 것들은 사라졌어.


목성의 등 뒤로 더운 바람이 밀려와.


고개를 돌렸어. 어느새 유리관이 덮어버린 할아버지의 철제 침상에서 불길이 일어. 푸른 불 사이 검게 타는 몸이 보여. 할아버지의 말이 맴돌았어. 늘 가장 보기 싫은 것을 떠올려라. 그리고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 두어라. 장미와 할아버지 모두 잃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사회일까. 왜. 장미 때문에?


“추-.”

장미가 말했어.


목성은 몸을 내던지다시피 달려가 장미를 껴안았어.


목성의 팔에 목덜미를 걸친 장미는 혀를 움틀거렸어. 천장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 번들거리는 입술로 겨우 말했지. “추-워-요.”


장미의 등을 찔렀던 기계의 팔이 소음과 함께 다시 한번 솟구쳤어. 목성의 눈과 마주쳤지. 팔이 다시 한번 장미를 향해 뻗어 나갔을 때, 목성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뻗었어! 두 개의 손이 맞닫기 직전, 목성의 여린 살과 뼈가 바스러지기 전에. 고장 난 손목시계의 화면이 켜졌어! 그리고 기계는 별안간 힘껏 제 관절을 비틀어버렸지! 반동으로 벽에서 뽑혀버렸어. 두터운 동맥 같은 붉은 케이블이 끊어져 스파크를 발해.


“마-을 부- 건-요?”

장미의 한쪽 눈만 목성을 바라보고 있어.


“마술을 부린 건지, 나도 몰라. 그런데 당신. 등이 뚫리고도 살아 있어요?” 목성은 찌를 듯 올라간 입가. 그리고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지. 장미는 거친 숨과 피를 뱉으며 대답했어. “보다-시피.” 목성은 장미를 들어 안고 복도를 나섰어. 장난감. 수술대. 인공 관절. 화학 장비 등 수많은 기계들이 그들 앞을 막고 서 있어. 다만 어떤 빛도 내뿜지 않아. 메두사의 낯을 본 전사처럼 그들은 돌이 되었어. 병원의 출입구가 활짝 열렸어. 그 중심에 백색 자동차가 서 있었지. 그 외 다른 차량은 없었어. 한꺼번에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넘어진 기계를 밟고 넘어가는 목성의 목에 장미의 입김이 닿았어. “어디-로 가-요.” 목성은 장미를 차 좌석에 조심스레 눕히며 대답했어.“꽃이 살어나는 곳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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