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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색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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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Oct 01. 2020

백색 밀실 - 2 검은 무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궁전의 출입구는 두 개의 궁전을 맞대고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수도승이라기엔 그의 검은 정장 차림이 수상해. 궁전을 지키는 경호원에 가까웠지. 지금 그는 거대한 전화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어. 좁고 단단한 이마가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끔씩 머리를 쓸어 넘기는 시늉을 하곤 했어. 그에게 다가갔어. 그러자 통화 소리가 조금씩 들려. 도무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어. 마치 암호처럼 알파벳과 기호를 읊조리고 있거든. 그것도 무척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우는 주술사 같아.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나는 그와 거리를 둘 겸 뒷걸음질로 돌아서서 궁전을 살펴보았어. 실내는 별다른 공간 없이 모든 곳이 트여있었지.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석관이 있어. 바닥, 벽, 천장 그리고 석관까지 모든 것이 검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실내는 세밀한 꽃과 별로 장식되었어. 나는 그 전경을 가늠하기 위해 뒤로 몇 걸음 물러섰어. 그러자 하나의 그림이 보이기 시작해. 돔으로부터 아치 그리고 바닥의 타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장관. 마치치 공허한 초원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야.  


 순간, 내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어!


 밤하늘의 은하수, 그 아래 불이 붙듯 생장하는 붉은 화원. 

 그리고 불 속에서 태어난 여자.



 벽화가 움틀거리기 시작해!


 보석으로 새겨진 붉은 장미 잎과 암녹색 가시덩굴이 움틀거려! 어디선가 싱그러운 초원 바람이 흘러나와. 아직 덜 마른 옷깃 아래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고 콧잔등 위로 베인 풀의 냄새, 짓이겨진 꽃잎의 체취가 들어차. 문득 발등에 별 하나가 떨어졌어. 고개를 들자 천장을 수놓은 별들이 나를 향해 늘어지고 있어. 무릎을 굽혀 별을 집어보았어. 끈적이는 발광체. 천장을 다시 바라보자 꽁무니에서 빛을 발하는 투명한 벌레가 가득해! 순식간에 실은 투망을 던지듯 순식간에 쏟아져 나를 뒤덮어버렸어!



 몸서리를 칠수록, 식충식물에 붙잡힌 벌레처럼 더욱 묶일 뿐이야. 실의 움직임에 이끌려 마리오네트가 돼버린 나는 비릿한 핏빛 장미들이 넘실대는 흑색 석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그러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날아가 손가락으로 그 관을 짚으려는 모양새가 되었어. 손가락이 관에 닿았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지금 여기는 진회색 아스팔트의 바다, 그리고 무채색 차들의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곳."


 순식간에 주위는 암흑으로 변했어.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저무는 태양과 건물들의 형상이 올라오기 시작해. 이곳은 어느 사거리의 횡단보도. 해가 저무는 중이야. 금빛 햇살이 건너편 차로에서부터 조명처럼 번뜩이고 있어. 꽉 막힌 차로의 백색 자동차들. 곧 붉은 눈의 거대한 백색 토끼들로 변했어. 그들은 붉은 브레이크 등을 점등하며 내게 신호를 보내는 듯 해. 그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어.


 횡단보도 맞은편에 어떤 여자가 서 있어.


 바람에 흩날리는 자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다만 그 여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느새 나는 그녀를 향해 뛰어가는 중이야. 지나치는 백색 토끼들의 붉은 눈에 어떤 남자의 모습이 비쳐. 반쯤 풀어진 넘겨 빗은 머리, 그리고 눈 아래 두 개의 점. 내 모습인가 봐.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어!



 손목을 잡힌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어!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지. 이곳은 검은 궁전이야.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중앙의 석관을 껴안고 있어. 붉은 장미로 장식된 검은 석관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져. 마치 누군가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것처럼. 그러자 사이렌 소리가 들려! '-쾅'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수도승이  향해 뛰어오는 중이야. 지금 그의 모습은 전혀 인간 같지 않아. 사이렌 소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중이야. 나는 신경이 곤두서고 동공이 팽창했어. 다리는 금세 뛰쳐나갈  근육을 수축하는 중이야. 그가 내 어깨를 투박한 회색 손아귀로 낚아채려 할 때,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밀쳐내고 궁전의 출입구로 도망쳤어! 쫓아오는 그에게 어깨에 걸쳤던 젖은 신발과 백팩 따위를 던졌어. 그는 옷가지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그 틈에 나는 간발의 차이로 햇살이 들어차는 입구를 통과했어. "-!" 사이렌 소리와 그의 외침은 입구를 넘어서는 순간, 사라졌어.


 그런데, 분명 입구를 넘어섰는데, 나는 여전히 건물 안을 달리고 있어! 황급히 뒤를 돌아봤어! 방금 뛰쳐나왔던 검은 궁전의 입구가 보여. 그리고 그 입구 너머 내가 빠져나왔던 검은 궁전의 실내, 그리고 그 수도승이 서 있어. 입구 앞에서 그 남자는 더는 쫓아오지 못하고 바둥거릴 뿐이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나는 주위를 세밀히 둘러보았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궁전의 출입구는 두 개의 궁전을 맞대고 있어. 여전히 수도승은 내게 뭐라 소리치고 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아. 그리고 수도승 뒤편의 검은 석관. 관 뚜껑이 조금씩 열리는 중이야. 곧 입구 너머의 풍경이 흐려지고 있어. 수도승도, 검은 석관도 사라져 버렸어. 대신 초목이 우거진 바깥 초원의 풍경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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