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5 아스팔트의 바다

지금 여기는 진회색 아스팔트의 바다.

by 류인환

이제 남아있는 무리는 몇 없어.


경적 소리도 줄어들었지. 차들은 제 집을 가게 되었어. 차도에 서 있는 사람은 유리 뿐이야. 의문이 들어. 다들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유리는 지나치는 차들 속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다고 말해.


건너편 빌딩 전광판에 보이던 광고가 꺼졌어. 속보. 양재 IC 도보 추돌사고. 신호등 파손. 사망 2명. 부상자 속출. 현재 차선 통제 중. 부상자는 있지. 하지만, 사고 때문은 아니야. 서로 멱살을 잡고 다투다 다친거잖아. 유리는 사람들이 서로의 주먹에 눈이 붓고 코가 깨지는 걸 봤어. 발길질을 하고 서로 뺨을 때리는 사람들. 유리는 생각했어. 그들은 신호가 사라졌기 때문에 분노가 치미는 것이라고.


유리는 전광판에서 자신을 찾았어. 차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검은 뒤통수와 아이보리 색 셔츠. 아쉬웠어. 얼굴이 나왔다면 영상을 수거해 가끔 누군가에게 기행 삼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뒷모습만 보아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손을 들어보았어. 잠시 후 전광판 속 아이보리색 바위 하나가 손 들었어. 이번엔 흔들어보았어. 막대기 같은 팔이 흔들거렸지. 그는 킥킥거리며 팔을 휘저었어. 전광판 속 미색 나뭇가지는 지나가는 차 떼 사이에서 제 몸을 흔드는 중이야. 마술을 부리려는 듯. 그러다 흠칫 동작을 멈췄어! 정신 차려야 해. 지금 이 영상은 기록이며 언젠가 회사 동료가 이 내역을 검토하다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잖아. 곰곰이 생각하다, 이 일은 회사에서 절대로 발설하지 않기로 했어. 유리는 다시 잠자코 바위가 되었지.




시간이 지나, 이제 차들은 예전의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 신호등도 교체되었고 이전의 그 대형 시체는 흔적 없이 사라졌어. 새로 심어진 것은 전혀 생물 같지 않았다. 그래, 원래 신호등은 기계야. 그저 입력된 알고리즘에 따라 불을 켜고 끄는 도구지. 유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신호등이 자신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어. 마치 꿈속의 논리처럼 말야. 이 역시 회사에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어. 유리는 몸을 일으켰어. 다리가 휘청거려. 너무 오래 있었어. 아직 대낮인 게 이상할 만큼.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을 걸었을 때.


빠앙-.


경적을 울리고, 차는 빠르게 지나갔어. 신호등은 어느새 붉은빛으로 변했어. 지나치는 차들이 유리에게 말해. 넌 아직 여기 있어야 한다. 유리는 자신과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을 찾아보았어. 그들은 저 멀리 전광판에 보이는 대로,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야. 그들은 유리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어. 사고의 원인이 그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생각했어. 하긴 그들이 자신을 언급했다고 해도,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가 자신의 흔한 얼굴을 기억하겠냐고. 덕분에 완전범죄를 저지른 셈이야. 그래도 조금 서러운 마음은 들어.


또 하나의 자동차가 유리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보았어. 추위에 콧물은 인중 끝까지 흘러내렸고 눈은 붉어. 붉은 헤드라이트처럼. 얼굴은 질린 듯 흰색이야. 백색 토끼처럼. 유리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어. 콧물을 몰래 훔치며. 그리고 팔을 내렸을 때.


지나치는 자동차 사이로 보라색 원피스가 보여.

무심코 고개 들어 바라봤어.




맞은편 저 멀리. 흘러가는 자동차 물결 중심에 한 여자가 서 있어!


유리는 얼른 고개를 숙였어. 지금 몰골은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보여주기 싫으니까. 고개 숙인 그의 시선에 그 여자의 원피스 끝단이 보여. 초가을 일렁이는 바람. 보랏빛 옷감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머리카락처럼 찰랑거려. 색감은 유리가 걸친 때 묻은 셔츠 따위는 비교되지 않는 순도야. 원피스 아래 드러난 종아리. 그리고 발끝을 감싸 쥔 검은 하이힐.


유리의 시선이 올라가. 다시 종아리, 원피스 끝단, 그리고 허벅지. 동시에 노골적으로 몸을 쳐다보는 것은 범법이란 생각이 들어. 그래서 고개를 틀고 싶었지만 눈이 말을 듣지 않아. 원피스 상단. 여자의 새하얀 어깨. 갈색 머리카락, 가는 목을 길게 지나 동그란 턱. 입술. 코. 그리고 눈.


그 눈은 유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


메두사의 눈동자를 본 듯 유리는 얼어버렸지. 자신을 꿰뚫는 듯한 눈빛. 방금 전까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유리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 여자는 온 눈으로, 몸으로 응시하고 있잖아. 유리도 여자를 빤히 바라봤어. 콧물 흘린 몰골 그대로. 그럼에도 창피하지 않아. 그런 사소한 감정들은 모두 잊은 채 그를 응시하는 여자의 눈빛을 응시하는 중이야. 그리고 혼잣말을 읊조려. 최면이라도 걸듯이.


지금 여기는 진회색 아스팔트의 바다. 그리고 무채색 차들의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곳. 바다 위에는 붉고 노란 등이 축제를 기념하듯이 펼쳐졌다. 등은 느리게 흔들거리고 번쩍거린다.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움- 하는 입 닫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지각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응시하는 그 행동 만을 쫓고 있어서 내 몸이 보내는 어떤 신호도 지각할 수 없다. 그래서 다리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팔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공기는 정신이 환기될 정도로 차갑지만, 춥지는 않다.


세상은 여전히 금빛.

다만 이제는 태양도 마음을 바꾼 듯 조금씩 옅어지고 있어.


다시 한번 유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

그 여자와 이곳에서 단 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것 뿐이야.




지금 여기는 진회색 아스팔트의 바다. 그리고 무채색 자동차들의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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