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백색 캔버스가 있다. 나는 캔버스에 붉은 선을 그었다.'
유리는 지금 침대에 누워있어.
눈을 감고 있지만, 시야는 매우 밝아. 눈을 뜨든 감든, 그의 눈꺼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밝음. 머리맡에 노트북을 두고 잠들어 그런지, 귓가에 전자파 소리 같은 이명이 들려.
삐삐-삐삐 삐삐삐-.
늘. 가위에 눌리면 신호를 시작으로 손바닥 하나가 그를 향해 서벅서벅 달려와. 마디가 두껍고 살찐 회색 손바닥. 오늘따라 유리는 그 기괴한 수면장애 부스러기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어. 그렇잖아도 무척 피곤한 하루였으니까. 베개에 배인 매연 냄새가 느껴져. 사거리가 떠올랐지. 왜 거기 있었을 까. 명확히 기억나지 않아. 생각나는 건 퇴근길 지나치는 사람들. 금색 하늘, 그리고 어떤 여자. 누군가 유리의 뇌를 건져 말끔히 표백한 것처럼 곧 그 이미지들마저 희미해졌어.
손가락은 어느새 유리 목까지 기어 왔어. 흉측한 손은 목을 힘껏 움켜쥔 채 검지 손가락을 끄집어 유리의 입술을 간지럽혀. 손이 숨을 틀어막고 말을 걸기 전에 얼른 깨어나야 해. 유리는 이런 가위눌림에 익숙해. 팔을 번쩍 들어, 반동으로 몸을 뒤틀면 돼. 그래서 몸이 풀리고 눈이 떠지면. 머리를 침대에 파묻은 채 엎드린 모습으로 깨어나. 그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거야. 눈앞이 깜깜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서서히 불 꺼진 방의 모습이 보일 거야. 날짜와 시간을 보고 이곳이 안전한 현실이며 누구도 자신을 해칠 이유가 없는 걸 알게 되겠지. 유리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워.
눈 앞에 백색 캔버스가 있다. 나는 캔버스에 붉은 선을 그었다. 선은 번지며 변신한다. 붉은 들소 떼 무리로. 그들은 맹렬히 달린다. 그러다, 막다른 절벽 끝에서 급히 멈췄다. 수 백의 소 떼들은 서로 앞발을 들고 뛰며 몸을 부딪히고 그 반동은 거대한 핏덩어리가 되었다. 붉은 파도는 힘껏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휘몰아치듯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붉은 빗방울은 혈관 속으로 들어차 내 손목 근육을 짓누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성가신 보챔에 응답하듯 손끝은 한 번 전율했어. 유리는 힘껏 팔을 들었어. 그리고 몸을 돌렸지. 성공했어. 짓눌린 뺨에서 이불 감촉이 느껴지고, 열린 창문에서 흐르는 초가을 밤공기를 알아챘어. 지금 시간은 새벽 네 시, 날짜도 그대로. 여기는 안전한 현실이야. 생각해보면 그 누구의 손도 유리의 숨을 틀어막을 이유가 없어. 이대로 다시 몸을 뻗으면 또 가위에 눌릴 것이 분명해서 물 한 모금 들이키고 정신 차려야 해. 유리는 읊조렸어.
"하나. 둘.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