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에게 주어졌던 밝음을 들이키던 테라스의 그들은 거인이 되었어.
처음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그저 물결 같은 것이 잔잔히 울린다 느꼈지. 그러다 그것이 소리란 걸 알았어. 유리는 풀밭에 누운 채 눈을 감고 들어보았어. 울음소리. 톤은 넓었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중이야. 신경을 더욱 집중하자,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 사람들 중에는 아주머니, 울며 보채는 꼬마, 그리고 화가 난 남자도 있어. 유리는 생각했어. 아까 전 횡단보도의 사람들일까.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어.
눈을 힘껏 떴어.
조리개처럼 열리는 시야. 미색 하늘. 풀밭. 테이블. 그리고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 그들은 천을 몸에 걸쳤어. 단추와 지퍼 따위는 달려있지 않아. 머리까지 천을 덮은 사람들은 마치 중세 수도승 같았지. 유리는 엉거주춤 일어나 그들을 향해 걸어갔어. 길을 물어보아야 하거든. 유리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야. 그들이 길을 가르쳐 줄까. 기괴한 옷을 입은 그들은 사이비일지도 몰라. 유리를 잡아 자신들의 우상에게 제물로 바칠지 모르지. 그들을 주시하며 천천히 걸었어. 언제든 뒤돌아 도망칠 수 있는 자세로.
닿을 듯 가까이 있는 것 같았지만 걸을수록 그들은 점점 커져만 갔어. 열 걸음쯤 더 걸었을 까. 유리는 그들이 보통 사람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알아챘어. 백 걸음 뒤에는 그들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그리고 거인이란 걸 알게 되었어. 맥주를 마시던 거리의 그들처럼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어. 어느새 거인들의 말은 쩌렁쩌렁 울리고 있어. 여전히 유리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어. 구름이 페인트 칠을 한 듯 균일한 두터움으로 뒤덮었지. 그 뒤편에 태양이 숨은 듯 주위는 열기로 헐거웠지만, 어디선가 산란한 바람이 계속 불어와 덥지는 않아. 보이지 않는 창문을 열어놓은 듯.
야외 정원 같은 이 곳의 지면은 정육면체의 돌 타일로 빼곡히 박혀있어. 사람들이 걸어 다녔을 만한 길이 사방으로 그어져 있지만 거인들 외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었지. 대신 버려진 고대 유적지처럼 곳곳에 석상 제단과 초석들이 있어. 그 을씨년스러운 잔해들을 곱씹어보다 유리는 기억을 떠올렸어! 이곳은 버려진 고대 도시라는 것. 어느 순간 사람들이 사라지고 유물들은 풀숲에게 먹히고 있는 곳. 거인들과 유리의 거리는 대략 오백 미터. 그는 지금 풀숲에 숨어 거인들을 보고 있어. 거인들이 사람들을 죽였을 거야. 주변에 오래된 해골이 몇 구 보이기 시작해. 유리 자신도 그들에게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지 몰라. 몸이 서늘해진 그는 옷깃을 잡아당겼지. 유리는 갈색 모피를 덮고 있었어. 빛깔만큼 부럽고 포근한 촉감에 마음이 가라앉았지. 거인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곳은 꽤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렇지 않니?"
누군가 유리에게 말했어!
속삭이는 목소리로. 유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언젠가 부러진 신호등 옆에서 그를 쳐다보던 여자가 보였어. 그 여자란 걸 알게 된 건 얼굴을 보고 나서도 한참 뒤였어. 얼굴이 매우 컸거든. 그녀는 거인이야. 거대한 몸을 바짝 엎드인 채 턱을 팔에 받치고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녀의 커다란 동공에 유리의 얼굴이 비춰져. 비친 유리의 얼굴은 그 자신을 바라볼 뿐.
그렇지 않니.
그. 첫 글자는 콘크리트 바닥에 쇠파이프를 끄는 소리처럼 날카롭고 마찰에 터지는 스파크 불꽃 같이 번뜩였지. 지난밤 신호등도 분명 그런 소리를 냈었어. 동시에 동굴 같은 그녀 목구멍에서 불어오는 입 바람의 파동이 유리의 뺨을 밀고 지나갔어. 그 여자의 체취와 함께. 드넓은 초원에 빽빽하게 솟아난 들꽃들의 냄새야. 유리는 여자의 거대한 눈망울을 보았어. 하얀 눈자위. 그 중점에 목성 같은 갈색 눈동자가 떠 있어. 우주를 바라보는 것 같아. 그 행성은 유리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굳어있는 그의 모습이 훤히 비춰졌지.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야.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어. 거인의 입술을 보여. 거대한 다홍색 아랫입술과 살구색 턱이 연결되는 파인 부분에는 도자기처럼 빛이 맺혀.
유리는 아무 말 못 했어. 그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에 기가 죽어버려서. 그리고 그녀가 너무 밀착한 채 말을 건 바람에, 자신의 입을 열면 미처 양치질을 못한 텁텁한 혓바닥에서 악취가 날까 봐.
매력적인 여자는 남자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유리는 생각해. 우월한 몸의 배치. 그만큼의 타고난 정신을 보며 남자는 남몰래 자신과 결합한 후세를 상상해볼거야. 내 묵은 신체와 정신을 그 여자의 태생적 우월로 씻어낸다면, 나의 아들은 보다 더욱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날거야.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나이기에 아름다움은 결국 내 것이라는 열망. 원초적인 소망은 이미 그 여자와 나를 동일시 여기게 되지만, 동등의 잣대는 결국 자기학대로 끝맺을 것이라는 것. 유리는 그 여자를 보며 생각했어. 고대 신화 속 메두사는 사실 엄청난 미인일 거야, 남자들의 몸이 굳는 걸 보면. 그들은 고뇌에 사로잡혀 돌이 되버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