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8 붉은 실

그녀의 거울 같은 눈에 비친 세상에는 하늘도, 정원도 없어.

by 류인환

그때.

유리 머리에 거대한 그림자가 앉았어.


바닥을 쳐다보며 상념에 빠졌던 그는 황급히 눈을 치켜 올렸어. 거대한 손바닥이 눈앞으로 떨어지고 있어! 모기를 잡듯 빠른 속도로. 그리고 툭. 부드럽게. 거인은 유리를 쓰다듬어. 손길은 매우 뜨거워, 떨고 있는 그의 몸을 빠르게 데웠지. 거대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은 유리를 귓불부터 뒷목까지 계속 휘저었어. 넘겨 올린 그의 머리카락은 아이처럼 산발이 되어버렸지. 강아지처럼, 유리는 몸이 녹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 체면을 차릴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지. 살벌한 정원에서 배를 내놓은 채. 거인도 해골도 실감이 나지 않아. 거인의 애완견이 되어서 얼마나 오래 유리는 쓰다듬어졌을까. 눈을 뜨면 그녀의 얼굴이, 감으면 손길이, 교차하며 정신을 사로잡았지. 아늑한 시간. 눈 마주침이 수십 번 반복될 쯤.


문득 유리는 그녀의 손길에 소름이 돋아버렸어!


눈망울이 호수 같아 마주보는 사람이 비친다는 것. 아름다운 경험이야. 하지만 지금처럼 눈망울에 비치는 세계가 유리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을 때. 더는 아름다울 수 없었어.


그녀의 거울 같은 눈에 비친 세상에는 하늘도, 정원도 없어. 그저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에 눈을 반쯤 감고 미소 짓는 유리의 모습만 보일 뿐. 그곳은 수평선 없는 백색 공간. 그렇게 그녀 눈에 비친 세상에는 단 둘밖에 없었지. 아니 유리 혼자 있었다고 하는 게 맞아. 눈망울은 거울처럼 깨끗하지만 그래서 불투명했지. 거울 뒤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그녀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유리를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속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어. 눈을 장식한 속눈썹만 흔들리고 있지. 철조망처럼. 장미 가시처럼.


온몸으로 쑥스러워 하는 유리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그녀는 어떤 생각일까. 사랑스럽다 생각할까, 한심하다 생각할까, 아니면 그저 먹이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애정으로 대해 줄 이유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유리는 자신이 정말 애완동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생각해봐. 짐승은 아무런 이유 없이 너에게 잡혀와 쓰다듬어지고 잠자리와 음식을 받겠지. 당황스러울 거야. 도대체 네가 왜 그토록 자신에게 끝없는 애정을 쏟아 부을지. 자신을 안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너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다가, 애정이 익숙해질 때 즘 짐승은 결론짓겠지. 그와 너는 애초부터 이런 애정의 관계가 될 운명이었다 하고. 그런데, 육식하는 널 보았다면 짐승은 어떤 생각이 들까. 온전히 제 삶을 너에게 의지하는 지금. 생활의 안락함이 더해져 짐승은 너를 극적으로 사랑하게 될 거야. 이런 얘기 있잖아. 납치당한 사람은 공포감과 동정이 뒤섞여 나중엔 납치범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납치범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기도 한다고.




동시에 유리는 그 여자는 다르다고 말해. 다른 짐승과 같지 않다고. 그는 오늘 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대. 그 말도 안 되는 사고 현장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빠져나오지 못했고, 계속 그를 무시한 채 차도에서 지나치는 차를 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고. 차들이 잠잠해질 때 웬 여자가 보였어. 사람들이 마주치고 사라지는 거대한 차선에서 유리를 쳐다보는 사람은 온전히 그 여자 한 명 뿐이었어. 둘은 마주 봤지. 길이 트일 때 서로를 향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 틈에 얼굴을 봤어! 그 순간 옆 차선 헤드라이트가 비춰 식별할 순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어. 그녀는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는 걸.


그 걸음걸이. 자연스럽게 흔들어지는 팔 동작은 마치 현대무용처럼 의미심장해서, 유리에게 무언가를 몸짓으로 말하려는 듯 했대.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를 지나쳤지. 자책했어. 떨리는 마음 탓에 고개를 먼저 돌려서, 실망하고 그를 벗어나 걸어간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관심 없었던 걸까. 만약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어. 사실 그도 잠깐 지나친 그녀에게 관심 가질 이유가 없으니까. 어쩌면 유리가 심장이 떨린 이유는 피곤했기 때문이야. 평범한 밤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사실. 그렇지 않니. 누구든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쳐다보게 되는 상황이 닥쳤다면,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이건 어쩌면. 인연을 이어준다는 붉은 실이 그녀와 나 사이에 이어져 있었고. 우리 앞의 수많은 차들은, 우리 사이를 이은 실이 너무 길어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발걸음 만큼 길게 엉킨 실타래였다는.




IMG_20141011_211841.jpg 그녀의 거울 같은 눈에 비친 세상에는 하늘도, 정원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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